영국 경제
손 세정제에서 온화하게 출발한 사재기는 화장지로 이어지고, 스파게티 같은 저장 식품으로 이어지더니 급기야는 쌀과 계란을 포함한 모든 식품과 생활용품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사재기 열풍이 칼이나 총 같은 무기로 이어지거나, 뱅크런(은행 인출 사태)으로 번지게 되면 그 사회는 비로소 막장으로 가게 된다.
물건을 사기 위해 싸우거나 밀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은 아니지만, Keep Calm and Carry On의 숭고한 정신은 타격을 입었다. 하루 종일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환자를 돌보다가 퇴근 길에 마트에 들렀는데 식료품이라고는 사과 몇개가 전부인 판매대를 보았을 때, 그걸 본 간호사의 공포심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의 눈에 아른거렸을 아이들의 모습과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어두운 곳으로 가는 것이 분명한 이 사회의 미래가 그녀를 울부짓게 만들었을 것이다.
간호사의 절망을 접한 유통업체들은 의료산업 종사자만을 위한 쇼핑 시간을 따로 만들었다. 사재기 와중에 착한 회사가 되긴 위한 유통업체간 경쟁도 치열하다.
사재기는 왜 하는가? 사재기는 합리적인가?
첫째, 사재기를 함으로써 사람들은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개개인의 심리적 안정감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모두가 사재기를 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 안정적일 것이지만, 개인으로서의 판단과 사회 전체로서의 판단은 위기시에는 다를 수밖에 없다. 죄수가 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여지없이 발휘되는 죄수의 딜레마이자 개별 합리성이다.
둘째, 사재기는 현금에 대한 매도(short) 포지션이다. 위기를 감지하면 생필품을 사게 되고 가격이 오른다. 다른 마트와 지난 주와 가격을 비교하는 사람은 없다. 물건 가격이 스물스물 오르고, 배달료도 인상된다. 결국 가치가 떨어지는 돈을 팔아 없애는 의미에서 사재기를 하게 된다. 이는 합리적이다.
셋째, 돈이 풀리면 돈의 가치는 더욱 떨어진다. 물건에 대한 수요 증가로 가격이 오르고 있는데, 위기 극복을 위해 돈이 천문학적으로 뿌려진다. 돈이 풀리기도 전에 돈의 가격은 이미 하락해 있는데, 돈의 공급이 급증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문가지다. 그래서 이제는 식료품보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물건을 사기 시작한다. 엔진오일, 프린터 잉크, A4 용지, 그리고 스테이플러 심까지! 감가상각이 진행되는 자동차나 설비에 대한 수요는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 감가상각의 크기와 인플레이션의 크기에 대한 비교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재기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부품 위주로 진행된다. 물론 호치켓 심이 그 핵심 부품인지는 모르겠다.
넷째, 소비가 증가한다. 사재기는 창고에 쌓아 놓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 기간을 놓고 보면 사재기로 인한 소비 증가 효과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화장실에 화장지가 가득하면 평소에 일곱 마디를 썼던 화장지를 열마디를 쓰게 되어 있다. 과자가 선반에 가득하면 빨리 먹어 없애야 한다는 의무감이 발동하기 마련이다. 사재기는 분명하게 과소비를 불러 일으킨다. 이는 위기에 빠진 경제를 살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
다섯째, 사재기는 고용을 창출한다. 정규직 직원만을 채용하고, 그래서 직원이 되기도 어려웠던 영국 최고급 리테일러인 Waitross가 매장 관리, 질서 유지, 배달 업무를 맡을 임시 직원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많은 유통 및 배달업체들이 직원을 채용하기 바쁘다. 일자리를 잃은 많은 실업자에게 잠시나마 일자리가 생기는 셈이다.
여섯째, 돈이 흐르지 않았던 곳에도 돈이 흐르게 된다. 이주일간 계란을 사지 못했다. 우연히 들른 구멍가게에서 계란을 봤는데, 현대적 포장이 아니었고, 계란에 닭 털도 묻어 있었다. 평시라면 이런 공급자가 계란을 팔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공급자도 돈을 만지게 되었다. 일시적인 숨통이겠지만, 생사의 경계를 오갔던 일부 공급자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다. 그 중에 소수는 선물처럼 주어진 유동성으로 인해 한단계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재기는 고착화 되어 있던 경제 질서를 한바탕 흔들어 버림으로써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 일으킨다.
일곱째, 사재기는 물건의 사용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사재기가 만연하면 가정마다 어느 물건은 넘쳐 나고, 어느 물건은 부족하게 된다. 그러면서 각각의 물건이 가지는 사용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군가는 휴지 한통과 계란 한개를 바꾸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계란 한판과 휴지 여섯개들이 한팩을 바꾸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판매되는 재판매 가격을 생각하면서 물건을 바꾸지 않고, 일상의 필요에 따라 즉 물건의 사용가치에 따라 물물 교환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 사재기는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해준다. 어려운 시기에 물건 가격을 유지하는 공급자와 폭리를 취하는 공급자를 구분하게 해준다. 선한 기업과 악한 기업을 구분하게 해준다. 기업뿐 아니라 사람의 퀄리티도 구별하게 해준다. 어려울 수록 나누는 것을 아끼지 않는 사람과 어려울 수록 자신만을 돌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둘, 사재기는 우리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닭 털이 묻은 계란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악덕 공급자 조차도 감사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는가? 사재기 덕에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