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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Jan 29. 2021

숲속학교와 웰링턴 부츠

런던 라이프

숲속학교와 웰링턴 부츠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 2018년 10월 2일이었다. 케이트 미들턴 케임브리지 공작 부인을 바로 눈 앞에서 봤다. 그녀는 우리 집 앞에 있는 페딩턴 레크레이션 그라운드에서 진행되는 숲속학교(forest school)에 왔었다. 둘째를 낳고 처음으로 외부행사에 나온 날이었다.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그녀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신기했다.

그녀의 의상은 심플하지만 세련미가 있었다. 바지는 자라(Zara)였으니 가격은 알아볼 것도 없었다. 부츠는 페네로프 칠버스(Penelope Chilvers)였는데 자라 바지와 잘 어울렸다. 스페인제 부츠인데 영국에서 475파운드다. 숲속학교에는 저런 의상이 어울리는구나 싶었다. 그 이후로도 그녀는 다른 행사에 여러번 같은 의상으로 등장했다.



다음 해에 막내가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숲속학교가 열렸다. 숲에 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주었다. 분홍색 부츠를 샀다. 숲속학교에 다녀온 막내는 다시는 안 간다고 했다. 땅은 질고, 앉을 곳도 없고,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안 갈 도리는 없었고, 매주 숲속학교에 가면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부모와 함께하는 숲속학교가 진행되었다. 부츠가 없어서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런던 라이프에 장화가 필수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내 기준으로는 용납이 안 되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님이나 부모님 누구도 위험하다고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가시덤불 같은 곳을 헤집고 다녔고, 진창에서 뒹굴었다.

우리 아이와 중국 아이는 정해진 길로만 가려고 했고, 아무 곳이나 다니는 친구들을 위험하다며 불러 세우기 바빴다. 길이 아닌 곳을 헤집고 다니는 저런 아이들이 나중에 다이슨(Dyson)을 만들고,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은 차이슨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스쳤다. 과민한 생각이었다.

집에 와서 웰링턴 부츠를 주문했다. 와이프 것은 95파운드 헌터(Hunter)로, 내 것은 14파운드 던롭(Dunlop)으로 샀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아이와 함께 집 뒤에 있는 숲에 가기로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숲에 간 날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요즘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숲 속에서 반 거지꼴로 나타나는 아이와 부모를 종종 만난다. 다시 케이트 미들턴도 떠올랐고, 숲속학교도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 오랜만에 부츠를 신고 집 뒤 숲에 갔다. 웰링턴 부츠의 성능은 좋다. 어릴 적 모심을 때 신었던 장화와는 달리 쿠션감도 좋고, 착용감도 좋다. 이를 웰링턴 부츠라고 하는 이유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최종적으로 물리친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이런 형태의 부츠를 처음으로 고안했기 때문이다. 무릎까지 오고 각종 장식이 달려 있던 기존 부츠에서 높이를 조금 낮추고, 장식을 제거하여 최대한 실용적으로 만들었다. 말 타기 편하고, 진흙이 많은 전장에서 유용하도록 의도했다. 웰링턴 부츠를 본 귀족들은 처음에는 단순함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개발한 사람이 웰링턴이란 것을 알고는 하나 둘씩 같은 형태의 부츠를 주문하여 신기 시작했다. 그렇게 웰링턴 부츠는 귀족들이 전쟁, 사냥, 산책 및 가드닝을 위한 신발이 되었다.

그 후로 고무로 된 부츠가 나오면서 웰링턴 부츠는 모든 사람이 비가 오면 신는 신발이 되었다. 웰링턴 부츠를 신고, 우산을 들고 singing in the rain 한다. 영국에서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일 년에 260일 비가 온다.

혹시 진흙에 넘어질까 아이 손을 잡아 주면서 잠시 나의 노후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분홍색 부츠를 신은 막내는 우리 곁을 떠나 있을 것이지만, 나와 아내는 오늘의 부츠를 그때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팔짱을 끼고, 웰링턴 부츠를 신고, 비글과 함께 숲 속이나 해변을 산책하고 있는 모습이라면 더없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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