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London Life 2.0
(12) 이것은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예감에 불과하다
장면 1. 현금의 고유한 특징
화폐가 디지털화되면서, 현금(Cash)이 가지는 익명성이 사라졌다. 이로서 중앙은행, 금융당국과 세무당국은 힘들이지 않고 코를 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암호화폐의 등장으로 현금 고유의 특징이 디지털 화폐에 구현되었고, 디지털 세상은 더욱 역동적으로 변모했다. 세상의 발전에 공짜는 없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각국 정부는 현금 고유의 특징을 되살린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를 고려하고 있다.
장면 2. 새로운 화폐에 등장하는 알란 튜링
영국 중앙은행은 2021년 6월에 새로운 50파운드짜리 지폐를 출시하는데, 지폐의 모델로 알란 튜링(Alan Turing)을 선정했다. 현재는 증기기관차를 만든 매튜 볼튼과 제임스 와트가 있다. 알란 튜링이 화폐의 인물로 결정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의사 결정에는 여러 차례의 여론조사가 동원되었다. 때문에 화폐 인물 선정에 중앙은행의 의지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때가 때인지라 꽤나 상징적이다.
화폐와 암호가 결합하는 암호화폐 시대의 개막을 법정화폐가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알란 튜링은 절대로 뚫을 수 없다는 독일의 에니그마 머신(Enigma Machine)의 암호를 해독하는 컴퓨터를 만들었다. 최고액권인 50파운드에 알란 튜링이 등장하는 것은 절대로 뚫을 수 없다는 블록체인을 뚫어 보겠다는 중앙은행의 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장면 3. 알란 튜링과 케인즈
컴퓨터의 시작을 알린 알란 튜링은 1912년생이다. 거시경제학의 시작을 알린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1883년생이다. 케인즈가 튜링보다 한 세대 앞선 사람이다. 둘은 공교롭게도 똑 같이 케임브리지의 킹스 컬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케인즈는 블룸즈버리 그룹의 멤버들과 동성애를 즐겼지만, 그의 동성애는 비교적 최근에야 알려졌다. 알란 튜링의 동성애는 1952년에 발각되어, 풍기문란죄로 유죄 선고를 받았고, 화학적 거세를 당했고, 부작용으로 1954년에 자살했다. 자살한 그의 곁에는 한 잎 베어 물은 사과가 남겨져 있었다. 1970년대 초까지 알란 튜링의 존재는 영국 정부에 의해 비밀로 부쳐졌고, 영국 사람은 그를 몰랐다. 알란 튜링의 동성애가 발각된 것은 집에 도둑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둑이 튜링의 연애 상대자와 면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연이 운명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장면 4. 알란 튜링, 딥 마인드와 이세돌
알란 튜링은 1951년에 이미 생각하는 기계, 기계를 교육하는 기계라는 개념을 생각했고, 그것을 인텔리전트 머신(Intelligent Machine)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이 AI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튜링은 알고리듬으로 수학 문제를 풀고, 체스를 두고, 언어를 번역하는 기계를 생각했다. 2010년 런던의 UCL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딥마인드(DeepMind)라는 회사를 만들었고, 이 회사가 만든 뉴럴 튜링 머신(Neural Turing Machine)이 체스를 넘어 바둑으로 당대 최고수인 이세돌을 이겼다. 자살하지 않았다면, 튜링은 104세의 나이에 딥 마인드가 이세돌을 이기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었다. 알란 튜링 집에 도둑이 들지 않았다면, 딥마인드는 이세돌이 아니라 조훈현이나 다케미야 마사키를 이겼을 수도 있다. 1954년에 죽은 알란 튜링은 딥마인드는커녕 어떤 컴퓨터 사이언스의 발전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장면 5. 증기기관차에서 AI로
알란 튜링이 13살 때에 처음으로 기숙학교에 가게 되었다. 당시에 기차가 파업을 하여 증기기관차가 모두 멈춰 있었다. 학교에 빠지기 싫었던 알란 튜링은 100km가 넘는 거리를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갔다. 50파운드 지폐가 제임스 와트에서 알란 튜링으로 바뀌는 것이 그때 예언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새로 나올 화폐에는 “This is only a foretaste of what is to come and only the shadow of what is going to be.”라는 말이 적힐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앞으로 올 것의 예감에 불과하며, 앞으로 존재할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앞으로 올 것의 전조에 불과하다. 빛을 환하게 비춰 그림자가 보이지 않도록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다가오는 미래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 그의 풍기문란죄는 201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사후사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