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London Life 2.0
- (13) 이 모든 것이 수에즈에서 시작되었다.
대형 컨테이너선이 수에즈 운하에 낑기는 바람에 해상운송 대란이 일어났다. 하루에 백여 대의 화물선이 통과한다는 수에즈 운하는 생각보다 폭이 좁다.
수에즈 운하는 대영제국 시대인 1869년에 개통되었다. 당시 운하의 폭은 더 좁았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에 러시아 발틱 함대의 소형선은 수에즈를 통과했지만, 주력선은 좁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가 없어서 아프리카를 돌고 돌아 케이프타운과 마다가스카르를 거쳤다. 천국이라 불리는 모리셔스를 지나면서, 멀리 한반도까지 전쟁하러 가고 싶었을까? 발틱 함대가 대마도까지 오는 데 7개월이 걸렸다.
수에즈 운하의 폭이 더 넓었더라면, 발틱 함대는 일본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무참히 패하지만 않았다면, 러시아군의 전력과 사기는 유지되었을 것이고, 러시아 황실의 인기도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남북 분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연성이 좀 그런가?
더 개연성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 이집트에서 나세르가 정권을 잡고, 1956년에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수에즈 운하는 영국과 프랑스의 컨소시엄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즉각 반발했다.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이집트가 이 전쟁에 응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을 돕는다는 명분 하에 전쟁에 참여하여 단숨에 수에즈 운하를 재장악했다.
세계의 여론이 영/프/이 동맹을 비난했다.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영/프/이가 수에즈 운하에서 즉각 퇴각하지 않으면, 런던, 파리, 워싱턴에 핵폭탄을 발사하겠다고 위협했다. 매카시즘의 시대였지만, 미국은 소련의 공갈에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지지할 명분도 없었다. 미국으로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행동도 탐탁지 않았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에서 철수했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영국은 1952년부터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수에즈 운하 때문에 러시아와 핵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땅이 크지만, 영국은 작은 섬나라다. 핵폭탄 하나로 러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는 없지만, 핵폭탄 하나면 영국은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는다. 영국보다 더 놀란 것은 프랑스였다. 미국의 핵우산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된 프랑스는 핵 개발에 돌입하였고, 핵 개발 경쟁이 치열해졌다. 프랑스보다 더 큰 위협을 느낀 나라는 서독이었다. 미국이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지키지 않는다면, 유럽은 미국 이외의 대안이 있어야 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유럽의 통합이었다.
영국의 당시 총리는 처칠의 후임인 안토니 이든이었다. 그는 수에즈 전쟁으로 인해 총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영국 역사상 가장 실패한 총리로 거명되고 있다. 수에즈 운하로 인해 프랑스와 독일이 미국을 믿지 않게 되었다면, 영국은 미국과 더 강한 동맹관계의 필요성을 느꼈다. 결과로 1958년에 영국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조약의 이름이 이렇게 길다.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for Cooperation on the uses of Atomic Energy for Mutual Defense Purposes.
수에즈 위기로 인해 프랑스는 미국과 더 멀어져야 된다고 생각한 반면에 영국은 미국과 더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렉시트도 이미 수에즈 운하에서 시작되어 버린 것인가? 영국은 시작도 안 한 유럽 공동체에서, 시작도 전에 탈퇴한 셈이 되어 버린 것인가?
수에즈에 낑긴 배는 마침 일본 컨테이너선이었다. 수에즈 운하가 좁아서 큰 덕을 봤던 일본은 이번 수에즈 운하 낑김 사태를 보면서 러일전쟁을 떠올렸을까? 다행히도 낑긴 배는 빠졌다고 한다. 영국의 타임스는 ‘Thank God, it’s finally moving’을 뉴스의 탑으로 실었다. 영국인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수에즈에 대한 소유권이 있는가?
오늘도 어딘가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어떤 사건이 터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글로벌 상황을 체크한다. 블룸버그도 보고, 타임스도 보고, 뉴욕 타임스도 보고, BBC도 보고, 다음과 네이버의 뉴스라인도 본다. 그런데 오늘 전 세계 뉴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뉴스는 전세금 1.2억 올려 받고 사임한 청와대 정책실장에 관한 이야기다. 거대한 배는 부동산이라는 좁은 운하에 낑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