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London Life 2.0 –
(17) 나는 지금 남성 또는 여성을 느끼지 못한다.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랜드 내셔날 대회다. 지난해에는 코로나로 개최되지 못하고, 인터넷 상에서 가상 경기가 벌어졌다. 무관중 경기가 아니라 가상 경기였는데, 무려 6백만 명이 시청했다. 베팅의 나라 영국이지만, 베팅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베팅을 멀리하는 내 친구는 50 평생에 딱 한번 스포츠 베팅을 해봤는데, 그 경기가 바로 그랜드 내셔날이라고 한다. 그는 경마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랜드 내셔날은 꼭 본다. 오늘 아침에는 시청을 잊지 말라고 메세지까지 주었다.
축구 경기 중에 골대 앞에서 골키퍼, 수비수와 공격수가 뒤섞여 넘어지면, 해설자는 그랜드 내셔날의 한 장면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랜드 내셔날은 과격한 스포츠, 넘어지고 쓰러지는 스포츠의 대명사다.
그랜드 내셔날은 리버풀의 에인트리(Aintree) 경마장에서 개최된다. 4마일 514야드(약 6.9km)를 달리면서 나무 덤블을 30번 넘는다. 30개의 장애물은 각각 고유의 이름과 특징을 가지며, 덤블을 구성하는 나무는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지역에서 나오는 것만을 가져다 쓴다. 덤블을 넘다가 말과 기수가 넘어지고 자빠진다. 40마리의 말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3마리만이 완주했던 적도 있었다. 말과 기수가 자주 다치기 때문에 동물 애호가는 대회 개최를 강력히 반대한다. 그러한 비난을 의식해 나무 덤블의 높이를 조금 낮추기는 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경기임에는 틀림없다. 올 해도 말이 넘어졌고, 기수가 떨어졌고, 40마리 중에 15마리만 경기를 완주했다. 말 한 마리가 죽었고, 기수 한 명이 병원으로 실려 갔다.
일터에서 자주 강조되는 건강과 안전(Health and Safety) 규정을 러비쉬(rubbish)라고 말하는 영국인을 자주 봤다. 안전은 필요하지만, 최우선 순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도전하고 경쟁하며, 흥분하고 열광하는 것도 안전만큼 중요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올해 우승은 아일랜드 말인 미넬라 타임스(Minella Times)가 차지했다. 우승마에는 레이첼 블랙모어(Rachael Blackmore)가 기승했다. 182년 전에 시작된 그랜드 내셔날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기수가 우승했다. ‘오늘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라고 영국 스포츠계는 열광했다.
182년 전이면 브리티시 오픈 골프가 시작된 것보다 21년 전이고, 축구리그가 시작된 것보다 32년 앞서며, 윔블던 테니스 대회가 시작되기 38년 전이다. 역사가 깊을수록 새로운 의미가 쉽게 부여되는 듯하다.
나는 아직 그랜드 내셔날을 직접 관람하지 못했다. 내년에는 꼭 리버풀의 에인트리 경마장에 가야겠다. 내 직관 역사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면서, 레이첼 블랙모어에 100파운드 베팅을 해봐야겠다. 레이첼이 우승하면, 여성 기수 최초의 2연패가 되기에 새로운 역사가 쓰였다고 영국인들은 또 좋아할 것이다.
경기 완주 후에 환하게 웃으며 마우스 피스를 빼는 장면에서 레이첼은 참 예뻤다. 첫번째 여성 우승자임을 상기시킨 리포터의 질문에 ‘지금 이 순간 나는 남성 또는 여성을 느끼지 못한다. 나는 심지어 지금 내가 인간이란 사실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라는 우승 소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