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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Oct 13. 2021

아일랜드 방랑객을 아십니까?

London Life

집시의 왕과 아일랜드 방랑객

(Gipsy King & Irish Traveller)

  

  

집시(Gipsy)라는 말은 꽤나 낭만적이며 철학적인 느낌을 준다.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 부르면, 프랑스적인 느낌이 가미되어 더 멋지게 들린다. 거기다가 퀸(Queen)의 보헤미안 랩소디까지 떠올리면, 더할 수 없어 근사해진다. 그러나.


여행 중에 집시를 만나면, 혼이 빠진다. 손을 벌리는 예쁘장한 아이에게 동전 하나를 쥐어 주면, 어디에선가 집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진다. 어린아이 중에 하나가 담배라도 물고 있으면, 담배빵이라도 당할까 겁이 난다.



현실을 떠나 낭만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지만, 집시와의 대면을 통해 ‘삶은 어디서나 낭만적이기 어렵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전 세계에 집시 혈통은 2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지난 일요일에 타이슨 퓨리(Tyson Fury)라는 영국의 권투선수가 미국의 와일더(Deontay Wilder)를 물리치고 챔피언 벨트를 지켰다. 와일더와의 첫번째 대결은 무승부, 두번째 대결은 KO승이었고, 이번 대결에서는 두 차례의 다운을 주고받은 끝에 11회 KO승을 거뒀다. 헤비급 대결 역사 상 최고의 명승부였다. 한편으로는 ‘마이크 타이슨 시절과는 달리 요즘 챔피언들은 주먹이 약해졌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두 명의 거구가 두 차례나 다운을 주고받으면서 11회까지 경기를 이어가는 모습이 낯설었다.


퓨리를 만나기 전까지 와일더의 전적은 40전 전승에 39KO승이었다. 주먹이 약한 챔피언 일리가 없다. 와일더를 이긴 퓨리는 206cm의 장신에 몸무게가 130kg이다. 이런 선수가 주먹을 맞고 고목처럼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나는 광경은 신비롭다. 어딘가 모르게 신비한 존재인 타이슨 퓨리는 스스로를 집시 킹(Gipsy King)이라고 부른다. 그는 집시인가?



그는 집시가 아니고, 아이리시 트레플러(Irish Travellers)다. 역사적으로 아이랜드에서 유목민처럼 유랑하며 살아온 집단이 있었는데 이를 아일랜드 방랑객이라고 부른다. 아일랜드에 셀틱 족이 오기 전부터 아일랜드에 살았던 원주민이란 설도 있고, 셀틱 유목민이라는 설도 있고, 크롬웰이 아일랜드를 정복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그 기원이 분분하다.


집시와 생활양식이 비슷하지만, 혈연적으로는 집시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30만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여전히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마차 같은 것을 타고 다니며 유랑하면서 살고 있기도 하지만, 타이슨 퓨리처럼 정착한 사람도 있다. 그중 상당수는 아일랜드 방랑객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열악한 거주 환경 탓에 유아 사망률도 높고, 평균 수명도 짧다. 퓨리의 어머니는 14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4명만 살아남았다. 퓨리도 조산으로 3개월이나 일찍 나왔는데, 태어났을 때 몸무게가 450g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당시의 복싱 헤비급 챔피언인 마이크 타이슨처럼 건강하게 자라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타이슨이라고 지었고, 그는 살아 남아 마이크 타이슨과 같은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고, 그제 집시 킹 같은 경기력으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아일랜드 방랑객 남자들은 전통적으로 맨주먹으로 싸우는 권투를 즐겼는데, 타이슨 퓨리의 아버지도 맨주먹 권투 선수였다. 퓨리의 집안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다. 타이슨 퓨리는 아일랜드 방랑객 여성과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두고 있다. 그리고 와일더와의 1차전에서 번 대전료 전액을 아일랜드 방랑객을 돕는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세계 챔피언이지만 여전히 아일랜드 방랑객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영국의 젊은이들은 퓨리를 무척 좋아한다.


집시 킹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집시가 다시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집시 힐(Gipsy Hill)이라는 지역도 있다. 사무엘 핍스(Samuel Pepys)의 일기에 의하면, 그의 아내가 1668년에 집시 힐 지역에 있는 아이리시 트레블러 거주지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19세기까지도 집시 힐 지역에 아이리시 트레블러들이 마차를 세워놓고 캠핑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번 주에는 런던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집시 힐 언덕 어딘가에서 캠핑을 해봐야겠다. 텐트 밖에서 담배를 하나 베어 물고는 집시의 낭만성을 흉내라도 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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