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이게 다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며칠째 집이 좀 추운 것 같다. 뜨거운 물은 잘 나왔는데, 난방은 안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난방 온도를 23도로 맞추고, 라디에이터를 만지는데 한 시간째 아무런 열감이 없다. 경력 있는 보일러 공을 부른다면, 시간당 50파운드는 지불해야 한다. 보일러 공은 이것저것 체크하면서 시간을 채울 것이다. 운이 나쁘다면 멀쩡한 배관 하나를 바꿔야 한다며 일을 크게 만들 것이다. 적게는 50파운드, 크게는 100파운드까지 들어갈 수도 있는 문제다.
“아빠 그러지 말고, 직접 고쳐 보세요.”
“내가 보일러를?”
“가든 관리하면서 나무도 옮겨 심고, 지붕에 올라가 타일도 직접 교체하는데, 보일러는 못 고치겠어요? 유튜브에 쳐 보면 다 나와요.”
‘유튜브에 다 나오면 네가 해!’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참았다. 공을 세워야 한다면, 마땅히 내 공이 되어야 하기에 용감히 보일러에 다가갔다. 하얀 보일러 통에는 Vaillant라는 브랜드 명이 쓰여 있는데, 보일러 자체는 꽤나 신뢰감 있게 생겨 먹었다. 액정이 반짝거리면서 F22라는 에러 메시지를 깜박인다. F1도 아니고 F2도 아니다. 무려 F22라니! 유튜브에 나올 리가 만무하다.
유튜브에서 Vaillant F22를 치니 영상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4년 전에 업로드된 한 영상은 조회수가 무려 22만 건이다. 2년 전에 업로드된 다른 영상은 6만 건, 1년 전에 업로드된 영상은 2만 건이다. 3분 내외의 간단한 동영상을 보고, 쉽게 보일러를 고쳤다. 와이프와 아이들로부터 온갖 찬사가 쏟아진다. ‘최고다.’ ‘대단하다.’ ‘든든하다.’
“뭐가? 내가? 유튜브가?”
유튜브가 2006년에 1조 8천억 원에 구글에 인수되었을 때, ‘구글이 참 바보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무슨 동영상 몇 개 모아 놓은 사이트를 1조 8천억 원에 사는가? 필요하면 만들지!’ 현재 유튜브의 가치는 무려 550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보일러 F22의 오류를 찾아본 사람이 지난 4년간 30만 명이라고 해 보자. 재빠르게 유튜버로 변신한 보일러공 중에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 사람은 꽤 돈을 벌었을 것이고, 다른 몇 명도 적당히 벌었을 것이며, 후발 주자 몇 명은 현상 유지가 가능한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유튜브가 증발시킨 것은 얼마나 될까?
F22 오류를 조회해 본 사람 중에 심심해서 우연히 클릭해 본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두 보일러 고장이라는 긴박한 문제를 풀어 보고자 영상을 시청했겠지! 유튜브가 없었다면, 그들 대부분은 전화로 동네 보일러 공을 부르지 않았을까? 모두들 나보다는 현명해서 50 파운드가 아니고 25파운드만 썼다고 가정해 보자. 지난 4년간 유튜브가 증발시킨 동네 보일러공의 매출은 F22 오류 하나만으로 7 500 000 파운드다. 우리 돈으로 115억 원이다. 오류 메시지는 F1에서 F75까지 있다는데, 이를 어찌할 것인가?
[지혜의 족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오태민은 ‘우리 사회가 인문학적 기반이 튼튼하고, 우리 주변에 새로운 기술이나 현상이 등장했을 때에 그것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해 주는 사람이 많고, 그들의 해석에 대해 우리가 활발하게 토론을 이어갔다고 하면, 우리는 지난 20년간 돈 걱정 없이 살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의 등장도, 모바일의 등장도, 유튜브의 등장도, 넷플릭스의 등장도, 블록체인의 등장도, 오징어 게임의 등장도, 그 어디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그저 새로울 것이 없다’라고 보는 사람은 늘 그 대가를 치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높은 확률로 내가 그 부류에 해당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보일러의 F22 오류 앞에서 유튜브에 대한 2006년에 가졌던 나의 혜안에 고개가 절재절래한다. 나의 이런 혜안 없음은 손바닥에 어떤 글씨를 씀으로써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는 분명히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