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물이 주인을 만나 얼굴을 붉히다”
포도주의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여기 있다.
200년 전에 옥스퍼드에서 어느 학생이 종교학 시험을 보고 있었다.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에는 어떠한 영적인 중요성이 담겨 있는가?’를 기술하는 시험이었다. 학생들은 두 시간 넘게 자신의 생각을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한 학생이 창밖을 바라보며 공상에 잠겨 있었다. 시험이 끝날 무렵에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교수가 ‘뭐라도 써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영국 대학은 한 과목이라도 이수하지 못하면 낙제가 되어 한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하지만, 옥스퍼드는 다시 다닐 기회조차 주지 않고 바로 쫓아낸다. 그러니 교수의 걱정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교수의 말에 학생은 펜을 들어 한 문장을 써서 제출했다. 영국의 학교에서 에세이 시험에 만점은 거의 없다. 선생님이 평생 본 최고의 에세이에 한하여 만점을 준다고 하는데, 만점을 받은 그 학생의 한 줄 에세이는 이러했다. ‘물이 주인을 만나 얼굴을 붉혔다(The water met its master and blushed.)’ 그 학생이 바로 위대한 시인 바이런(Lord Byron)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지만, 기독교적 시각에서는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물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을 만나 수줍어 얼굴을 붉혔다는 말 이외에 무엇을 덧붙일 수 있을까?
와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해 붇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피라는 단어로 인하여 레드 와인이 연상된다. 그러나 적재적소에 찬란한 비유를 사용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어법으로 보았을 때, 피라는 단어를 레드 와인으로 바로 연결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성경에 포도주가 여러 차례 나오지만, 포도주가 붉은색이었다는 말은 왠지 없을 것 같다.
많은 한국 교회가 성찬식에서 레드 와인을 사용하고 우리 교회는 포도 주스를 사용한다. 그러나 내가 가본 영국 교회는 성찬식에 화이트 와인을 사용했다. 만일 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얼굴을 붉혀 포도주가 되었다면, 그 포도주 빛깔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와인은 로제(rose)가 아니었을까?
내가 로제에 눈을 뜬 것은 사치 갤러리 맞은편에 있는 ‘파트리지(Partridges)’에서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끔 장을 보러 온다는 이곳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슈퍼마켓이다. 매장 한가운데 오크 통이 있었고, 그 위에 몇 병의 로제 와인이 희미한 양파껍질색(pale onion)을 발하고 있었다. Whispering Angel(속삭이는 천사)이라는 이름의 와인은 아름다움 자체였다.
프랑스 칸느 근방에서 ‘로제 르네상스’라는 캐치프레이지를 걸고 2006년에 등장한 이 와인의 생산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는 천사가 속삭이고 있어요. 이 와인을 마시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곳에 와보면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로제가 전성기를 맞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르네상스는 웬 말인가? 와인 전문가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와인은 로제에 가까웠다고 한다. 레드와 화이트 와인이 나오기 전의 포도주는 로제였다. 로제가 다시 부흥기를 맞을지는 모르겠으나, 위스퍼링 엔절의 마케팅 구절이 좋고, 차갑게 마시는 로제가 좋다.
Whispering Angel을 마시면, 창백한 나의 얼굴에도 맑고 고운 분홍빛이 돈다. 유명한 초상화 속 여인의 홍조처럼 말이다. 로제를 마실 때마다 바이런의 에피소드를 생각하게 되고, 물을 포도주로 만든 예수님의 기적을 생각하게 되고,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나의 성찬식엔 로제가 사용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