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
민주주의는 냉혹하다
런던으로 돌아왔다. 해외부재자 투표가 눈앞으로 다가왔지만, 마음은 정해지지 않았다.
우리에겐 굳건한 박정희 신화가 있었다. 그걸 깬 것은 김대중도 아니고 NL/PD도 아닌 박정희의 딸 박근혜였다. 우리에겐 거악을 척결하는 검찰에 대한 신화도 있다. 그 신화는 문재인이나 조국에 의해 깨지지 않았다. 그것은 검찰의 아들 윤석열에 의해 깨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의 최우선 과제로 검찰개혁을 생각하는 사람은 윤석열을 찍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나는 검찰 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최우선 과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미래의 먹거리라고 불리는 경제고, 좋은 일자리리고 불리는 노동의 가치다. 경제를 잘 이끌 적임자로 이재명과 안철수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선거벽보를 보면 그 사이에는 또 윤석열과 심상정이 있다.
1992년에 백기완 선거운동본부에서 일했고, 개표 당일에는 민중당 대표로 개표 참관위원으로 일했다. 공무원인 형은 개표를 진행했고, 나는 형 뒤에서 개표를 지켜보았다. 중간에 빵도 같이 먹었다. 밤샘 개표가 끝나고 5만 원이 든 봉투를 받았는데, 형은 그걸 자기 양복 안 주머니에 넣었고, 나는 그걸 민중당에 빼앗겼다.
그 후로 내 마음은 진보정당을 떠났다. 내 소신은 고작 5만 원 짜리였다. 진보정당은 노동의 결과를 지켜주기는 커녕 빼앗아 갔다. ‘자본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노동의 가치도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남자의 가치도 모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삶의 가치도 모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일 번과 이 번 모두에 도장을 찍은 용지도 있었고, 모든 후보에 도장을 찍은 용지도 있었고, 정확하게 센터를 잡아 일 번과 이번 사이에 찍은 용지도 있었다. 당시에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본 가장 슬픈 용지는 정성 들여 각을 맞추어 접은 투표용지에 아무런 기표도 없는 것이었다.
우리의 마음은 모든 후보에게 기표하는 것이기도 하고, 일 번과 이 번 사이에 정확히 센터를 맞추는 것이기도 하며, 순서를 따라 1번 4번 2번 3번 순으로 기표하는 것이기도 하며, 아무 기표 없이 투표용지를 마구 접어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냉혹하여 그러한 여러 감성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
“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