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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Aug 01. 2022

여자 축구의 품격에 관하여 2

London Life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들에 관하여

  

  

1. 어디나 이야기꾼이 있다. 우리 시대 이야기꾼은 백기완 선생님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아크로폴리스에서 듣고 있으면, 저 이야기가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 실제로 겪은 이야기인지 대단히 궁금해진다. 그의 이야기에는 놀라운 흡입력이 있었다. 선생님이 전문 이야기꾼이 되지 않고, 정치활동에 시간을 빼앗긴 것은 시대의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2. 백기완 선생님에 필적할 이야기꾼으로 영국에는 마이클 머퓨고가 있다. War Horse를 쓴 작가다. 그는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어느 순간 전업 작가가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꾸며낸 이야기지만 어느 것은 들은 이야기고 어느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일 것이란 확신이 든다.


3. 셰익스피어가 있어서만은 아니고, 디킨스가 있어서만도 아니고, 롤링이 있어서만도 아니고, 영국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데에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된다. 영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꾸며낸 이야기 같기도 하고, 어디서 들은 이야기 같기도 하며,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같기도 하다.


4. 잉글랜드 여자 축구가 유로 대회를 우승했다. 여자 축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뉴스다. 여기에 스토리가 입혀져 예술 같은 역사가 된다. 해설자는 축구의 성지인 웸블리에 모인 87 192명 관객 하나하나가 역사의 일부라고 말한다. 남자 경기를 포함해 모든 유로 대회를 통틀어 최대 관중이었다. 웸블리에서 어제오늘 축구를 한 것도 아닌데, 마치 오늘을 위해서 그 전에는 티켓을 일부러 조금 덜 팔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다. 오늘의 여자 경기를 위해 이전의 남자 경기에서 표를 정말 덜 팔았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의 경기가 남녀 경기 통틀어 유로 역사상 가장 많은 관중이 들어섰다는 팩트 자체다.


5. 독일은 지난 12번의 유로 여자 축구 대회 중에 8번을 우승했다. 결승전에 8번 진출했는데, 8번 모두 이겼다. 게리 리네커가 축구는 독일이 이기는 경기라고 했는데, 그게 남자 축구를 염두하고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면 사실에 가깝지만, 어느 면에서는 오해다. 남자 축구는 독일은 잉글랜드와 역대 전적에서 대등하고, 이탈리아와 역대 전적에서 오히려 열세다. 독일 여자 축구는 기량뿐만 아니라 정신력 면에서 최고다.


6. 오늘의 경기에서 1:0으로 지고 있던 독일이 1:1을 만들면서 분위기가 독일 쪽으로 흘렸다. 잉글랜드가 이길 것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문전 혼전 중의 결승골에 행운이 따랐다. 독일로서는 내용을 이기고 결과에서 졌기에 두고두고 아쉬울 한판이었다. 결승전 8전 전승이라는 들은 이야기 같기도 하고 꾸며낸 이야기 같기도 한 신화는 오늘 축구의 성지에서 깨졌다.


7. 오늘의 스토리를 누가 만들었다면 핵심은 잉글랜드와 독일의 축구 전쟁을 우크라이나 심판이 관장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축구는 유럽축구를 지배한 독일과 축구의 종주국 잉글랜드 사이에 신화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었다. 이것은 축구뿐 아니라 전쟁이었다. 전쟁을 우크라이나가 심판한 것이다. 세팅이 예술이다. 오늘 심판진이 최고의 심판진은 아니었을 수 있지만, 그들은 역사적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옐로카드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경기 흐름을 잘 조절했다. 독일도 잉글랜드도 받을 카드를 받았고 안 받았으면 하는 카드는 받지 않았다.



8. 잉글랜드 여자 축구 우승이 영국이라는 나라에 큰 의미를 가진다. 잉글랜드 축구는 영국 축구의 1/4이다.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축구가 따로 있다. 잉글랜드는 자신들이 영국 축구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축구 협회나 축구팬이 볼 때는 택도 없는 이야기다. 잉글랜드가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했을 때 잉글랜드 축구팬은 열렬하게 스코틀랜드를 응원해 주었지만, 스코틀랜드 축구팬은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응원해 주지 않았다. 축구가 역사적 적대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그 점은 잉글랜드 축구팬에는 늘 서운한 점이고, 스코틀랜드 축구팬 입장에서는 서운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다.


9.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축구팬이 잉글랜드 여자 축구를 이번 대회에서 열렬히 응원해 주었다. 잉글랜드 팬이 그렇게도 원했던, 다른 축구협회와 축구팬의 지원을 여자 축구가 드디어 받아 낸 것이다. 이 점은 영국 축구 역사뿐 아니라 영국 역사 전체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10. 축구 해설자가 웸블리에 모인 사람 하나하나가 역사의 한 부분이었다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진정으로 그랬다고 말할 수 있다.


11. 오늘의 축구는 머퓨고를 잇는 또 다른 이야기꾼에 의해 소설로,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다.


12. 오늘 축구를 보면서 당황했던 것은 여자 선수도 결승골을 넣으면 우통을 벗는다는 사실이다. 여자 축구는 남자 추구보다 훨씬 품격 있지만 결승골의 감격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은 똑같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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