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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Jul 29. 2022

모스크바서는 안 되고 런던에서는 잘 되는 말

London Life

모스크바에서는 안 되고 런던에서는 잘 되는 말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는 것은 뭐랄까 좀 촌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올드한 것 같기도 하고, 그거 없이도 사회는 잘 움직인다.


내국인과 외국인 구분이 투철한 곳 중의 하나가 소련이었다. 소련은 외국인을 일단 스파이라는 전제 하에서 봤다. 소련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구소련 국가일수록 외국인과 내국인 구분이 심하다. 어느 나라에서는 여전히 외국인과 내국인의 자동차 번호판이 다르다.


오래전 러시아 어느 박물관에는 표 값이 세 종류가 있었다. 러시아 사람, 구 소련 지역 사람, 그리고 외국인. 구 소련 지역 사람은 그래도 좀 쌌다. 자신들은 배려라고 한 거지만, 배려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스파이는 아니고 2급 시민이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스파이보다는 나은 대접이니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까? 외국인 표 값을 지불하려다가 카자흐스탄에서 발급된 신분증을 제시해 보았다. 판매원은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신분증에는 카자흐스탄 국기도 있었고, 이름도 러시아어로 쓰여 있었고, 사진도 있었다. 그래도 미심쩍어하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카자흐스탄에서 온 애들은 너 보다 러시아어를 다 잘하던데! 심지어 우리보다 잘하던데!’ 기분이 나빴다. ‘내 러시아어가 어때서? 카자흐스탄에 나보다 러시아어 못 하는 사람 많아!’라고 말했다.


어제 갑자기 현금이 필요했다. 애플페이만으로 현금을 만들려고 했는데 잘 안되어서 거래 은행에 갔다. 큰 점포가 아닌 작은 점포는 영업시간도 짧고, 주 4일 근무를 하는 곳도 많아서, 줄이 대체로 길다.


줄을 서 있는데 창구에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가 애를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언뜻 러시아 말을 하는 것처럼 들렸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가가 도와주고 싶었는데, 뭔가 모를 감정이 나를 붙잡았다. 내가 보기에 할머니는 카드를 잊어버려서 재발급을 원하는 것 같았다. 도와줄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고 상황을 이해하고 창구직원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일처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거리감! 거리감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머니 손에 쥐어진 우크라이나 여권을 보았다. 나는 심하게 친절한 표정으로 전쟁 전에 왔는지 후에 왔는지 물었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오지랖을 시전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대답은 해주었으나 자꾸 멀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일을 마치고  줄로 돌아 가는데,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서 왔냐?’ 나는 한국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반색했다. ‘미안하다. 나는 네가 러시아에서   알았다. 어떻게 그렇게 러시아 말을 잘하냐?’ 칭찬이 고마웠고, 박물관에서  파는 직원이  러시아어가 이상하다고 했던 말도 생각났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거동이 편하지 않지만 전쟁 후에 우크라이나에서 영국으로 왔고 나름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빨리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한다. 아직은 자식들이 보내 주지 않는다고. 그리고 너무너무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할머니가 느낀 거리감이란 것이 내가 러시아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어쩐담! 모스크바에서는 그렇게 이상했지만, 런던에서는 이리도 완벽한 내 러시아어를! (물론 이것은 농담이다.)


내 차례가 왔고, 나는 상황을 설명하고, 현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카드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그냥 핸드폰만 있었다. 창구 직원은 종이를 하나 주고 내게 주소와 이름을 쓰고 사인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현금을 내게 건네주었다. 신분증도 필요 없고, 그 무슨 증명도 필요 없고, 국적도 필요 없고, 애플페이조차 보여 줄 필요가 없었다. 이 시스템이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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