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Life
하릴없이 지붕에 오르다
1. 런던 집은 대게 100년 이상 되었다.
2. 지붕 타일도 100년 이상 된 것이다. 오래되다 보니 교체 수요가 있다. 타일을 10장 사서 들고 오는데, 타일 파는 곳에서 주차장까지 멀지 않은 길을 몇 번을 쉬어서 갔다. 100년 된 집이 그런 무거운 타일 수천 장을 머리에 이고 있다.
3. 지붕에 낀 이끼를 떼어 내야 할 때도 있다. 물받이(gutter) 청소하다가 타일을 건들기도 한다. 천장에 있는 유리창을 닦다가 타일을 깨트리기도 한다. 타일을 하나 교체하려면 타일 몇 개가 필요하다. 교체하면서 다른 타일을 밟으면, 100년 된 타일이 주르륵주르륵 금이 가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지붕은 전문가(roofer)에 맡겨야 한다. 집 수리공 중에 문제 있는 사람이 많지만, 악질 중 악질은 지붕 수리공이다. 그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내 런던 라이프는 더 평온했을 것이다.
5. 코로나가 한창 일 때에 지붕에 있는 이끼 제거를 위해 견적을 받았다. 덩치 큰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가장 싼 400파운드를 제시해서 그들을 고용했다. 지붕 타일이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고압의 물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결국 고압의 물을 분사하여 지붕을 청소했다. ‘고압을 안 쓴다며?’ ‘이건 고압이 아니고 중압이야!’ 덕분에 타일 여러 장이 날라 갔다. 타일을 정돈하고 교체하는 데에 600파운드를 추가로 요구했다. 그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견적 받을 때 가장 전문적으로 보였던 팀을 새로 불렀다. 그 팀은 회사 유니폼도 입고 있었고, 회사 로고도 멋있었고, 신발이나 장비에도 전문성이 있어 보였다.
6. 그들과 600파운드에 계약했다. 지붕에 올라갔다 온 루퍼가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면서 1200파운드를 주면 그것까지 해결하겠다고 했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지붕에서 내려오더니 지붕 대들보 하나가 썩어서 교체해야 한다며 사진까지 보여줬다. 스카폴딩(비계)을 설치해야 한다고. 견적은 2400파운드까지 올라갔다. 선금으로 절반을 달라고 했다. 약간 의심스럽기 시작했지만 선금을 줬다.
7. 그들은 이틀간 일하는 척을 했다. 일을 조금 하기는 했다. 지붕의 평평한 부분에 방수포를 교체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수다만 떨었다. 당연히 비계는 설치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던 그들은 갑자기 일어나더니 일을 다 했다며 나머지 1200파운드를 달라고 했다. 눈에 보이는 부서진 타일도 교체하지 않았다. 부서진 타일을 가리켰더니 조금 후에 타일이 교체되어 있었다. 분명히 새 타일을 가지고 올라가지 않았는데 말이다.
8.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나를 쉽게 보았다. 썩은 대들보 사진을 다시 보여 달라고 했다. 그들은 사진 보여주기를 거부했다. 썩은 대들보 사진은 인터넷에 나도는 사진이었지, 우리 집 지붕 사진이 아니었다. 나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쇼핑몰 외장공사까지 해본 사람이다. 조목조목 따지며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가져간 선금 1200파운드 중에 절반을 토해 내라고 말했다. 호주 사람이었던 그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더니 결국 선금을 챙기는 선에서 만족하려는지 줄행랑을 쳤다.
9. 이상해서 지붕에 올라가 봤더니, 보이지 않는 곳의 타일을 빼서 보이는 곳의 타일을 교체했다. 이 정도일 줄은 상상을 못 했다. 미친 루퍼였다. 고발을 고려해 봤다. 당장 급한 것은 뚫린 지붕을 어떻게든 메꾸는 것이었다. 직접 새 타일을 사서 막았다. 그때부터 가끔 비가 새기 시작했다. 이상한 점은 비가 오면 항상 새는 것이 아니고, 바람을 동반한 비가 오거나 눈이 녹을 때에만 아주 조금 샜다. 원인을 파악하고 수정하기 위해 진짜 전문가를 찾아야 했다. 비싸더라도 믿을만한 루퍼를 찾아야 했다.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10.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런던에서 루퍼에게 사기당한 케이스가 부지기수였다. 어느 루퍼는 지붕에 타일 한 장을 교체하고, 4만 파운드를 받아 갔다가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혼자 사는 할머니가 지붕에 올라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고 사기를 친 것이다. 그도 인터넷에 나도는 썩은 대들보 사진을 써먹었을까?
11. 나도 처음부터 루퍼랑 같이 지붕에 올라갔어야 했다.
12. 시간이 지나고 물받이 청소를 잘한다는 루마니아 팀을 소개받았다. 그들은 청소에 200파운드를 요구했다. 일은 잘했다. 그들에게 물이 가끔 샌다고 했더니 몇 장의 타일을 교체하면 된다고 간단한 해답을 제시했다. 100파운드를 더 달라고 했다. 타일 몇 개를 손에 쥐어 줬더니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그날 300파운드를 받아 갔다.
13. 그들이 다녀 가고 오랜만에 다시 물이 샜다. 다시 직접 지붕에 올라갔다. 그들이 가지고 올라간 타일은 지붕 맨 꼭대기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교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 그냥 두고 내려왔다.
14. 헬멧을 쓰고 완전군장을 하고 다시 지붕에 올라갔다. 일반 타일 8장, 밸리 타일(V자형 이음새 타일) 2장을 가지고 올라가서 두 시간 정도 작업했다. 올라간 김에 유리창 청소도 했다.
15. 루퍼들은 왜 이 모양일까?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봤다. 담배는 사기를 당하고 난 후에 피는 것이 제 맛이다. 지붕에서 피는 것이 또 제 맛이다. 지붕으로 사기를 수차례 당한 후에 지붕에 올라가서 피는 담배가 담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16. 그 후로 일주일 정도 바람을 동반한 비가 왔지만, 다행히 아직은 비가 새지 않고 있다. 앞으로 가끔 담배가 생각날 때면, 하릴없이 지붕에 올라갈 참이다. 오늘도 한번 올라가서 피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