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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Aug 27. 2023

바티칸에서 보는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의 충돌

London Life

바티칸에서 보는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의 충돌

    

   

바티칸에서 수많은 흉상과 조각상을 보았다. 바티칸 박물관을 브리티시 뮤지엄이나 루브르 박물관과 비교하면 어떨까? 영국과 프랑스 박물관이 인간이 모은 전시품이라면 바티칸 박물관은 신의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함이 느껴진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군사관학교에서 치워질 예정이라고 하여 논란이 심하다. 이는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이 충돌하여 일어나는 일이다. 흉상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쉽게 세워졌다 치워졌다 한다면 우리는 언제 브리티시 뮤지엄이나 루브르 박물관 같은 것을 만들까? 바티칸 뮤지엄은 고사하고 말이다.


나는 홍범도 장군과 인연이 깊다. 1997년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카자흐스탄에 갔을 때, 선배 단원이 끄질 오르다에서 결혼했다. 완행 기차로 24 시간이 넘게 걸렸다. 무덥고 모기가 많았다. 솔직히 사람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결혼식을 거행하고 신랑신부와 하객이 홍범도 묘역에 참배했다. 결혼하고 독립투사를 참배하는 것은 의미가 깊지만, 그곳 말고는 갈 곳도 없었다. 그게 소련 작은 도시의 특징이다. 갈 곳을 없게 만드는 것이 소련의 특기다.


나는 봉사단원 첫해를 아스타나에서 보냈다. 지금은 카자흐스탄 수도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사람도 없고 할 것도 없었다. 알마티 대사관에서 참사인가 공사인가 하는 사람이 방문한다고 하여, 머물던 집주인아저씨에게 말해주었다. 그는 화가였는데, 손님에게 주겠다며 그림을 정성 들여 그렸다. 홍범도 장군의 초상화였다.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에 비길 것은 없겠으나 당시 내 눈엔 걸작으로 보였다. 참사인지 공사인지는 방문을 약속한 날 나타나지 않았다.


15년 후에 그의 집을 방문해 보니 홍범도 초상화는 그 집에 그대로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한국에 가져왔다. 나는 유해를 옮기는 것이 반대했지만, 소금바람과 혹독한 더위와 흉악한 모기의 땅에서 유해를 가져온 것이 잘한 일 같기도 하다. 로마의 더위와 모기도 견디기 어려운데 말이다. 홍범도 유해 송환은 일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고, 그 무렵에 육군사관학교에 흉상도 생긴 모양이다. 그 흉상이 옮겨진다고 한다. 육군사관학교는 공산주의자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리의 민족 정체성의 상당 부분은 반일에서 나온다. 고로 독립투사는 민족 정체성의 귀중한 부분이다. 원전오염수 방류도 민족 정체성의 문제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육군사관학교는 민족 정체성을 세우는 학교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세우는 학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상당 부분은 반공에서 나온다. 대한민국 출범 당시에 일본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고, 오로지 공산주의가 문제였다. 남한과 북한이라는 나라가 정체성을 만들던 초기에 공산주의와 우리는 사활을 건 전쟁을 벌였다.


그렇다면 홍범도는 공산주의자인가?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홍범도는 소련 영토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투사로서의 현실적 선택이었다. 홍범도는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말년에 끄질오르다에 있는 고려극장에서 문지기를 하며 살았다. 김구 선생이 자신은 해방조국의 문지기가 되어도 좋다고 했는데, 홍범도 장군은 해방조국도 아니고 소련의 작은 도시에서 실제로 문지기를 했다.


그는 이차대전 때에 이미 상당한 노인이었지만, 전쟁 참여를 자원한 군인정신의 소유자였다. 그의 자원이 받아들여졌다면, 나찌와의 전쟁이나 일본과의 전쟁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그의 자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이차대전이 끝나기 전인 1943년에 사망했다. 당연히 해방도 북한도 남한도 몰랐다.


그는 소련의 국민이었고, 공산당원이었고, 공산주의에 뜻을 둔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의 독립투사를 공산주의 전력으로 인해 배제하는 것은 논란을 일으킨다. 육군사관학교가 민족 정체성이 아닌 국가 정체성을 추구하는 곳이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설립 이후에 반국가 단체에 연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흉상을 없애는 것은 과연 필요한 조치인가?


해방이 있었고 남북분단이 있었고 6.25 전쟁이 있었다. 소련은 6.25 전쟁에 많은 무기를 대주었지만,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적지 않은 고려인과 러시아인이 군사고문단 자격으로 북한에 가서 북한을 지원했다.


아스타나에서 만난 어느 고려인 아주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북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김일성의 아들 그러니까 김정일과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97년까지도 북한은 추석과 설이면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소련에 있던 고려인이 북한 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주장이 아니다. 홍범도는 이북 태생이었고, 소련 국민이었기 때문에 6.25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그는 높은 확률로 북한을 위해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정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가? 철두철미한 공산주의자도 스탈린 치하에서 하루를 살고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김일성 치하에서 숙청당한 소련파가 여전히 북한 편일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좌파 지식인이 소련을 방문한 후에 공산주의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한번 공산주의자가 영원한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의 영웅을 되도록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산주의자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공산주의는 시대의 제물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포괄성이 대한민국 정체성의 주요한 일부로 자리 잡아야 할 때에 우리는 오히려 순수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육군사관학교의 이번 조치는 시대착오적이다.


우리 중 일부는 오염수 방류를 민족의 정체성 문제로 본다. 찬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다루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독립투사를 지나치게 순수하고 배타적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많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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