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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Nov 20. 2023

칸트의 미학과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London Life

칸트의 미학과 윤석열 대통령의 외교

  

   

외교학과에 입학하여 느낀 것은 외교관이 내게 맞는 옷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외교관은 헨리 키신저나 제임스 베이커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외교관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외교가 대한민국 국력에 맞는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온전히 외교관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칸트의 미학이다.


우리의 외교는 많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목적성을 띤다. 외교는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없어야 한다. 즉 ‘목적이 없는 목적성’이거나 ‘목적성이 없는 목적’이어야 한다.


칸트는 아름다움을 순수한 감각적인 만족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어떠한 것이 객관적인 목적이나 유용성이 없지만 그 자체로 감각적으로 만족스러운데, 만족을 주는 것이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아름다움은 이러한 ‘목적이 없는 목적성(purposiveness without purpose)’에 바탕을 둔다. 즉 예술은 목적이 없는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외교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런 것은 아니다. 외교에는 목적이 있어야 할 수도 있고, 목적성이 있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있어야 한다.


나이키가 신발을 파는데 신발의 구조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공기층이 두껍다고 광고할 수 있다. 그것은 목적성이 있는 목적이다. 다르게도 광고할 수 있다. 땀으로 범벅된 마이클 조던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얼굴에서 땀방울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떨어지는 땀방울을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나이키 로고와 함께 air라는 단어가 나온다. 이것이 목적성이 없는 목적이다. 목적이 없는 목적성이 예술이라면, 목적성이 없는 목적은 세련이다. 즉 목적이 없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예술이라면, 목적이 있는데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세련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방문이 예정되어 있다. 공군 1호기에 기자와 경제인이 잔뜩 타고 올 것이며, 대기업 CEO와 해외사업본부장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을 잔뜩 구매했을 것이다. 런던에서 경제간담회를 할 것이며, 수십 개의 MOU를 체결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순방으로 10조 원 넘는 계약이 체결되었고, 실제 경제효과는 계약액의 수십 배가 넘을 것이라는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드라마틱하게 강조될 것이다. 그리하며 목적성은 누가 보더라도 촌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아름다운가?



우리 외무부와 청와대가 칸트의 미학을 이해한다면 이렇게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리쉬 수낙 총리가 예고 없이 2부 리그 축구 경기에 나타난다. 허더즈필드 구장에서 벌어지는 영국 축구 2부 리그 경기의 사우스햄튼 원정석에 등장한다. 최소한의 수행원은 주변에 드러나지 않게 있을 것이다. 대통령과 총리는 맥주 한 잔을 손에 들고 축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윤석열 대통령이야 토트넘 경기를 보고 싶겠지만, 그렇게 되면 축구 보러 놀러 갔냐는 비난을 감수해야 된다. 그래서 사우스햄튼을 선택한 것인가? 그건 아니고, 사우스햄튼은 리쉬 수낙이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축구팀이기 때문이다. 축구 이야기를 하던 윤석열과 리쉬 수낙은 중간중간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평화에 도달할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할 것이다. 하프타임 때 데이비드 카메룬이 핫도그 세 개를 들고 나타날 것이다. 리쉬 수낙과 윤석열, 그리고 데이비드 카메룬은 손흥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이 대화 주제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돌릴 것이고, 최근에 우크라이나를 다녀온 데이비드 카메룬이 우크라이나에서 젤렌스키를 만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모든 과정은 방송 카메라에 잡히는 것이 아니고, 허더즈필드까지 온 사우스햄튼 원정팬의 핸드폰으로 촬영될 것이다. 그렇게 축구와 국제 정치가 조화를 이룰 것이다. 축구장 방문에는 거창한 목적이 없을 수도 있지만, 대화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축구팬의 눈에는 큰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게 바로 ‘목적이 없는 목적성’이다. 아름다운 장면이 될 것이다.


이벤트를 기획한 기획자는 이 장면을 통해 ‘목적성이 보이지 않는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글로벌 리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영국 총리와 글로벌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대통령, 데이비드 카메룬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보고를 받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10조 원짜리 MOU보다 훨씬 값어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장면이 쌓이고 쌓이면 아마도 100년쯤 후에 우리에게도 헨리 키신저나 제임스 베이커 같은 외교관이 탄생할 것이다. 우리 국민은 칸트를 이해하지만, 우리 정치인과 외교관은 칸트가 국제정치에 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해서는 그들의 외교가 국민의 눈높이에 맞을 수가 없다. 적어도 칸트를 곡해라도 해야 우리 외교는 조금의 세련미를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신발창의 레이어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르까프를 더 이상 신지 않고, 실제로 공기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나이키 에어를 신는다. 그런데 대통령이 아직도 르까프를 팔러 전 세계를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과도한 목적과 눈에 보이는 목적성 때문에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는 르까프를 말이다.


이번 순방이 르까프가 될지 나이키가 될지 볼 일이다. 그리고 이번 순방을 준비한 사람들이 칸트가 구분한 목적(purpose)과 목적성(purposiveness)의 차이를 얼마나 인지하고 있는지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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