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공부
이스라엘 공부(3) – 선언과 합의, 그리고 hindsight
우리가 가진 편견을 극복하려고 이스라엘을 공부하고 있어요. 되도록 객관적이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자료도 보고, 알자지라 방송도 보죠. 물론 한계가 있죠. 이곳에도 저곳에도 억울함뿐이에요. 우리가 가지는 편견도 그 억울함에 기여하고 있어요.
(1) 팔레스타인은 먼지만 풀풀 날리는 곳이었다
오스만 제국 시절에 팔레스타인에는 70만 명 정도가 살고 있었는데, 영국인과 유대인은 사람이 거의 안 사는 지역이었다고 말해요. 팔레스타인은 억울하죠. 강성했던 오스만 제국도 억울할 것 같아요. 역사적 도시 예수살렘은 상업이 발전했고,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지중해 연안의 하이파와 야파(지금의 텔아비브)는 아주 발전한 도시였어요. 기차도 있고, 철강 공장도 있고, 높은 건물도 있고, 시계탑도 있었어요. 당시 영상을 봐도 꽤 발전한 도시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다른 측면도 있어요. 이스라엘, 하이파, 야파가 그렇게 발전했는데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70만 정도가 살았다면, 전원지역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다는 의미가 되죠. 비경작지도 많았다는 의미가 되고요.
(2) 벨푸어 선언은 생뚱맞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벨푸어 선언(1917년) 이전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은 거의 없었다고 말해요. 그러나 1914년 조사에 이미 94,000명이 있었어요. 많이 늘고 있었고, 시오니즘 운동 때문이었죠. 유럽 전역의 반유대주의 때문이었고요.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이 반유대주의 흐름 속에서 나왔다는 면에서 뜬금없는 것이 아니었듯이, 벨푸어 선언도 완전 생뚱맞은 것은 아니었어요. 1차 대전에서 유대인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영국은 오스만 제국 이후에 이 지역을 인터네셔날한 지역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지중해에서 중동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죠.
(3) 영국은 일방적으로 유대인을 지지했다
벨푸어 선언의 벨푸어는 영국 외교장관이잖아요. 아일랜드와 영국 갈등의 현장인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페스트와는 다른 거예요. 영화 벨페스트를 보면 그곳 갈등도 보통이 아니었죠. 벨푸어 선언은 영국의 내각과 유대인과 프랑스와 미국이 오랜 논의 끝에 만들어서, 유대인 지도자인 유명한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공개 편지죠. 편지에 유대 민족의 집(a national home)을 만드는 데에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쓰여있어요. 동시에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비유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도 명시되어 있죠. 유대 민족의 집이라는 표현은 의도적인 애매모호함이죠. 처음에는 유대인의 피난처라는 했어요. 그것은 유대인의 강력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죠.
(4) 서방은 뻔히 알면서 갈등을 조장했다
뻔히 알면서 그런다? 남편들이 와이프에게 많이 듣는 비난이죠. 나도 나를 모르는데, 와이프 마음을 어떻게 뻔히 아나요? 19세기 후반부터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왔을 때, 초기 정착은 아주 평화적이었어요. 1937년에 스탈린이 고려인 수십만을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시켰을 때, 카자흐인은 친절하게 고려인을 대해 주었어요. 홍범도 장군 같은 고려인이 영하 40도의 혹한에 내던져졌을 때, 카자흐인은 음식을 주고, 집을 짓는 것을 도와주었죠. 팔레스타인 사람도 카자흐 사람만큼이나 평화를 사랑했던 것 같아요. 친절하고요.
영국 사람은 아랍인과 유대인이 갈등을 벌인다면, 자신들이 심판을 보겠다고 생각했어요. 축구 경기의 심판처럼요. 옐로카드 줄 때 옐로카드 주고, 레드카드 줄 때 레드카드 주고요. 필요하다면 VAR도 하고요. 물론 VAR에도 실수는 있죠.
(5) 수십만과 수십만의 싸움에 심판을 보겠다는 것은 망상이다
벨푸어 선언 이후에 유럽의 정치 지형이 급격하게 변해갔죠. 반유대주의가 늘어나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규모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죠. 1935년에만 6만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어요. 홀로코스트 때는 말도 못하고요. 2차 대전이 끝나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죠. 트라우마죠. 전세계로 갔지만, 다수는 미국보다는 팔레스타인을 선호했어요. 그들에게 national home이 필요했죠. 팔레스타인 이주가 너무 많아지자, 영국은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했어요. 하이파와 야파로 들어오는 유대인 배를 가로채서 5만 명의 유대인을 영국령 사이프러스로 강제로 데려가기도 했어요. 영국의 예상과 컨트롤을 벗어나고 있었죠. 러시아 유대인들도 몰려왔죠. 스탈린의 반유대주의와 스탈린이 만든 지옥을 피해서요. 영국 행정권력과 유대인과의 갈등도 심해졌고, 유대인 무장단체가 영국 행정기관을 공격하는 일까지 있었죠. 심판은 기능을 잃어갔고, national home으로는 안되고 유대인의 나라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물론 유대인이 유대 국가를 만든다면, 팔레스타인 사람은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들어야죠. 결국 공은 UN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6) UN은 아무것도 못하는 허수아비다
우리는 UN를 좀 허접하게 보죠. 우리나라는 UN 덕을 가장 크게 본 나라고 우리나라 사람이 UN 사무총장까지 했는데 말이죠. 그분이 너무 물렁하고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하고 다녀서 UN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러나 UN은 인류 역사의 기념비죠. 전세계인이 모여서 민주적으로(정확히 말하면 비교적 민주적으로) 투표를 통해 국제질서를 만들어 나간 적이 언제 있었나요? 참으로 괄목할만한 인류의 진보죠.
(7) 전승국이 전횡을 저지른다
전승국은 지분을 가지죠. 전승국은 할 말이 많죠. 우리는 즉각적인 독립을 원했지만, 우리에겐 지분이 없었죠.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죠. 반탁이 있었고, 찬탁이 있었죠. 지나고 보니 느끼는 것이지만(hindsight), 그리고 대한민국이 잘되었기에 결과론이지만, 신탁통치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었어요. 조금 흥분을 유발시킬 수 있는데, 하인드사이트고, 결과론이니까, 결과가 좋았으니 너그러이 넘어 갈 수는 없나요?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서 시행착오가 많았을 수도 있어요. 신탁통치가 옳았다는 것은 아니고, 찬탁한 사람도 매국노는 아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주세요. 당시의 저라면 저도 반탁을 했을 것이지만, 지금의 저는 찬탁에 가까울 것 같아요.
남한은 UN 감시 하에 선거를 했고, 대한민국을 수립했죠. 미국은 떠났죠. 북한도 국가를 수립했죠. 모르긴 몰라도 소련은 김일성의 폭압성이 자기들 마음에 들어 마음 놓고 떠났을 거 같아요. 남한과 북한은 각자 나라가 되었고, UN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분단 시스템은 UN의 승인을 받은 셈이 되었죠. 남한과 북한에서 미국과 소련이 전횡을 저질렀다고 할 수도 있고, 온건하게 말하면 그들의 지분을 가져갔다고 할 수 있죠. 제국주의적이죠? 모든 것이 힘없는 우리의 설움이었지만, 적어도 남한은 미국과 UN의 도움을 받았죠.
(8) 김일성은 공산당이라 죽일 놈이다
김일성이 자본주의를 알았겠어요? 자유주의를 알았겠어요? 민주주의를 알았겠어요? 스탈린이 모르는 것을 김일성이 어떻게 알았겠어요? 공산주의는 제대로 알았는지 모르겠네요. 공산주의로 북조선을 이롭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무지였죠. 무지는 죽을 죄는 아닌가요? 그의 죽을 죄는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이죠. UN 체제를 정면으로 어긴 것이죠. 6.25 전쟁으로 3백만 명이 죽었어요.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1차 이스라엘-아랍 전쟁에 사활이 걸렸지만,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6,000 명이 죽고, 아랍은 13,000명이 죽었어요. 김일성이 왜 죽일 놈인지는 말해야 입만 아프죠. 이걸 남한 편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남침유도설을 소신으로 가진 사람이 있다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이고, 같이 공부할 것도 없죠. 그는 죽일 놈 맞아요. 그래서 봉석이 아빠가 출동한 것인가요?
(9)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편파적이다
맞아요. 전승국 영국은 아랍지역을 임시 통치했고, UN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분할을 결정했어요. UN이 정하면 팔레스타인은 따라야 하나요? 자신들의 의견을 낼 수 있죠. 그리고 UN 결정을 막기 위해 외교적으로 노력할 수 있어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는 하죠.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에 소련도 찬성했어요. 소련 지도자 중에 유대인이 많았다고요? 스탈린은 반유대주의자였고, 스탈린도 찬성했어요. 팔레스타인은 억울하지만, 그 안을 받았어야 했어요. 합의에 동의한 적이 없어도 국제적 합의를 따라야 할 때가 있어요. 권력관계를 알았어야 했어요. 우리는 사회계약설에 동의한 적이 있어서 사회가 성립했나요?
결과론으로 가면 할 말이 많아지고 다 현인이 되죠. 지금 팔레스타인은 나라인가요? 팔레스타인은 어떤 땅을 가지고 있나요? 그 안을 받았어야 했어요. 그리고 힘을 키워야죠.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남북 분단을 받아들인 것처럼요. 알자지라 방송에 의하면, 유대인이 오기 전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적이고, 문화적이며, 역동적이었고, 현실적이었데요. 하이파와 야파와 예루살렘이 무역으로 번성했기 때문에 국제감각도 좋았데요. 그럼 1940년대 한국인보다 나았잖아요. 받았어야 했어요. 이건은 당위의 문제가 아닌 현실의 문제였어요. 결과론적 현실이라서 민망하기는 하네요.
(10) 팔레스타인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다
주장할 수 있죠. 다시 말하지만 민족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만들어진 민족에게만 자결권이 있어요.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 민족이 많죠. 쿠르드와 팔레스타인 아랍인을 포함해서요. 팔레스타인은 지금이라도 예전 분할안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정파를 선택해야 해요. 유대인 전부를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하마스를 지지해서는 안되죠.
4차례에 걸친 아스라엘 아랍 전쟁의 결과는 어땠나요? 아랍 국가는 얼마나 팔레스타인을 책임졌나요? 그들은 이제 자기 민족 만들어서 불구경하고 있잖아요. 단일한 아랍 국가를 희망하는 아랍인은 지금 얼마나 있나요? (많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제각각 민족국가를 만들었고, 자결할 수 있는 민족이 되었는데, 팔레스타인에게는 무엇이 남았나요? 페르시아 민족국가의 지지로 충분한가요?
(11) 이스라엘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만들어지고, 바로 전쟁이 났어요. UN의 팔레스타인의 분할안이 승인이 나고 유대인은 유대국가를 만들게 된 소식에 춤을 췄지만, 유대 지도자 벤 구리온은 그날부터 침략에 대비했고, 실제 전쟁이 났죠. 팔레스타인이 여전히 혼란한 가운데 6.25 전쟁이 났죠. 벤 구리온은 즉각적인 파병을 주장했어요. 남한을 돕기 위해서죠. 그러나 이스라엘 공산당 반대에 부딪혀 전투병 파병은 못했죠. 공산당은 왜 맨날 나쁜가요? 그래도 100,000 불을 대한민국에 지원하여, 우리는 그 돈으로 의약품도 사고 식료품도 샀어요. 당시 십만 불은 큰돈이었겠지만, 3백만 명이 죽은 전쟁에 표시가 나겠어요? 그래서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우리를 도와준 점은 사실로서 알고 있는 것이 좋겠어요. 자꾸 중립에서 조금씩 멀어지나요? 한계가 돋보이네요.
(4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