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예술
(1) 영국의 제국주의와 크리스탈 팰리스
1851년에 하이드 파크에서 세계 최초의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었다. 철골과 유리로만 지어진 박람회 전시관을 크리스탈 팰리스라고 했다. 산업화된 영국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박람회가 끝나고 건물을 통째로 런던 남부의 시든험 힐로 옮겼다. 지금의 크리스탈 팰리스 공원이 그렇게 생겼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공원이다.
시든험 힐로 옮겨진 크리스탈 팰리스 전시관에 영국이 아편전쟁(1839-42, 1856-60) 과정에서 빼앗은 중국 유물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는 중국인과 영국 지성인을 격분시켰다. 그중에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있었다. 후에 영국 총리를 한 윌리엄 그래드스톤(William Gladstone)은 아편전쟁만큼 영국 역사를 불명예스럽게 만든 것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영국인은 아편전쟁을 어떻게 바라볼까? 수많은 제국주의 침략 중의 일부였고, 20세기에는 그보다 더한 사건도 많았기에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영국인에게는 잊힌 사건이지만, 중국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2) 로얄 오페라 하우스의 발레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공원, 박물관, 공연장을 더 자주 가보고 싶다. 로얄 오페라 하우스의 발레 공연이 일 순위다. 백조의 호수 같은 그런 전통적 발레 말이다.
알마티와 아스타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그리고 런던의 로얄 오페라 하우스에서 발레 공연을 많이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런던 로얄 오페라 하우스의 발레가 가장 좋았다. 분위기 탓이었던 것 같다. 모던하면서도 클래식한 건물에 매료되었고, 공연장을 감싸는 자유로우면서도 로얄한 분위기가 좋았다.
발레만큼 임페리얼이나 로얄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예술이 없다.
(3) 러시아 발레와 소련의 발레
발레는 루이 14세의 프랑스 궁전에서 시작되었고, 러시아 황실의 후원으로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발전했다. 1877년에 볼쇼이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가 차이코프스키 음악과 함께 초연되면서, 발레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났다. 궁정과 귀족의 예술이었던 발레는 혁명 후에 소련에서 사라질 것으로 생각되었다. 발레리나, 안무가, 음악가들이 소련을 떠났다. 그중 한 명이 경제학자 케인즈의 부인인 리디야 로푸코바다. 그러나 발레는 소련에서 살아남았다.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교육부 장관이 레닌을 설득하여 발레를 존속시켰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Что Делать?)’라는 책에서 레닌은 ‘상상력이 없이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했다. 루나차르스키의 노력과 레닌의 예술적 감성이 러시아 발레를 살린 것이다.
리디야 로푸코바의 오빠인 표드로 로푸코프처럼 탈출하지 않은 예술가들의 노력으로 소련의 발레는 발전했다. 스탈린 시기에 발레는 사회주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선전 무기로 활용되었다. 소련에 손님이 오면 혁명극을 보여주었다. 스탈린 사후에는 볼쇼이 발레단과 마린스키 발레단은 해외 공연을 자주 다녔고, 그 와중에 발레리나, 안무가, 음악가들의 망명은 계속되었다. 아래 첫번째 사진과 두번째 사진을 비교해 보자. 첫번째 사진처럼 작품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두번째 사진같은 작품을 하라고 하면 누가 하고 싶겠는가?
(4) 붉은 양귀비 꽃, 소련과 중국의 관계
혁명 후 등장한 최초의 혁명적 발레는 ‘붉은 양귀비 꽃(Red Poppy, Красный Мак)’이다. 1927년에 초연된 이후 3천 회 이상 공연된 소련 발레의 대표작 중에 하나다. 내용이 어마 무시하게 엉뚱하다.
‘1920년 중반에 소련의 배가 중국의 항구에 나타난다. 영국인 제국주의자가 중국인 잡역부를 착취하는 모습을 본 소련 함장이 중국인을 구해낸다. 화류계 중국 여성이 소련 함장의 영웅적인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붉은 양귀비 꽃을 주며 춤을 춘다. 남자 친구가 질투심을 느끼고, 우여곡절 끝에 화류계 여성이 죽는다. 죽으면서 붉은 양귀비 꽃을 다른 중국인 여성에게 전달한다.’
중국인이 보기에는 두가지 점에서 어이없는 작품이다. 첫째, 중국 여성을 화류계 여성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영국인의 시각과 소련 함장의 시각은 차이가 없었다. 둘째,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상처인 아편 전쟁을 스캔들의 소재로 삼았다. 이 발레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소련과 중국의 연대감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표현된 것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무시와 무지였다.
소련과 중국은 사이가 나빴다. 이념이 같았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노선의 차이가 있었지만, 관계가 나빴던 것은 노선 때문이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노선 때문에 감정이 상한 것이 아니라, 감정 때문에 노선이 생긴 것은 아닐까? 중국 고위 관료가 모스크바에 방문했을 때마다, 소련은 연대의 차원에서 ‘붉은 양귀비 꽃’ 관람을 추천했다. 간극이 너무 커서 소련은 뭐가 뭔지 몰랐던 것이다.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뒤늦게 발레의 스토리도 바꾸었고, 제목도 ‘붉은 양귀비 꽃’에서 ‘붉은 꽃’으로 바꿨다. 그렇다고 해서 소련과 중국의 간극이 좁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5) 중국의 분노
크리스탈 팰리스는 1937년에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었고, 2차 대전 때에 철거되었다. 독일의 공습으로 폭탄이 떨어질 경우에 유리 파편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주춧돌, 돌계단, 조각상 등이 남아 있다. 2013년에 중국 재벌인 Ni Zaoxing은 영국 산업화의 상징인 크리스탈 팰리스를 복원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영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은 이걸 왜 복원하려고 했으며, 영국은 왜 거부했을까? '중국의 근대화 역사는 아편 전쟁에 대한 복수의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마오쩌뚱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은 ‘붉은 양귀비 꽃’의 관람을 권유했다. 마오쩌뚱은 거절하고 ‘백조의 호수’를 봤다. 엉터리 혁명극을 보는 것보다는 퇴폐적인 궁중 예술을 보는 게 나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발레는 역시 백조의 호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