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라이프
체스에 대한 에피소드 몇 가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체스가 세팅되어 있고, 첫 수가 두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예준이가 어제 저녁 아래층에서 아빠를 애타게 불렀던 것이 체스를 두자는 것이었다. 바쁘다며 내려가 보지 않았는데, 한 수가 놓인 체스판을 보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은 축복이다.
페이스 북은 뜬금없이 몇 년 전의 사진과 스토리를 보여주곤 한다. 아이들 옛 사진을 보면 그때 더 놀아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금 더 놀아 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5년 전의 예성이는 지금의 예성과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놀아준다고 해서 5년 전에 놀아 주지 못한 것이 만회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놀자고 할 때 잘 놀아줘야 하는데, 어제는 그러지 못했다. 오늘 체스를 두면 되지만, 오늘의 예준은 어제의 예준과는 또 다른 예준이라는 생각에, 애잔한 맘은 여전하다.
체스를 처음 보았을 때, 장기나 바둑과 달리 말 하나하나가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았다. 장기처럼 한 박스 안에서 뒹구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기 위치가 있는 것이 아름다웠다. 더 아름다운 말에게 더 아름다운 방을 마련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언젠가는 비싼 체스를 사겠다고 다짐했다. 그 꿈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실현되지 못했다.
몇 년 전에 카자흐스탄의 프라다 매장에서 멋진 체스를 봤다. 가격이 450만 원 정도 했다. 몇 번을 만져 보았고, 세일도 기다렸지만, 계절과 유행을 타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세일 대상이 아니었다. 팔리지 않아 세일할 때가 되면 연락을 달라고 했더니, 한 달에 10개 이상 팔리기 때문에 그럴 일이 없을 것이란 대답을 들었다. 밀라노에 갔을 때 프라다 매장에서 그걸 찾아보았는데, 조금 쌌지만 큰 차이가 없어서 사지 못했다.
체스를 처음 둘 때에 장기와 유사한 것에 놀랐다. 장기에서 체스가 유래했는지, 체스에서 장기가 유래했는지 궁금했다. 6-7세기에 인도에 차투랑가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이것이 서양으로 가서 체스가 동양으로 가서 장기가 되었다. 동양의 장기에서는 왕을 보좌하는 세력이 선비인데, 서양의 체스에서는 왕보다 유능한 왕비가 왕을 보좌하는 점이 특이하다.
체스 세계대회는 1851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해가 1851년이다. 체스 대회의 주최자는 Howard Staunton이었는데, 스스로 체스 챔피언을 자처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 세계의 체스 고수가 한 자리에 모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스타운턴을 세계 챔피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세계 챔피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스타운턴은 EXPO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했다. 총상금이 5억 원에 육박했고, 자신이 챔피언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돈이 없었던 독일의 체스 고수 아돌프 안데르센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교통비와 숙박비를 자비로 대주었다. 참여자가 많아야 모양새가 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승을 바로 그 아돌프 안데르센이 차지해 버렸다.
매년 12월에 런던에서 London Chess Classic이 개최된다. 최근 10년간의 우승자를 보면, 노르웨이, 러시아, 인도, 미국에서 챔피언이 탄생했다. 지난해에는 베이징 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중국의 딩 리렌이 우승했다. 장기와 체스가 유사하기 때문에 앞으로 동양인들이 체스 대회를 제패하는 것도 맘만 먹으면 어려운 일은 아닐 듯하다.
나도 장기 두듯이 체스를 두며, 그래서 체스부터 배운 아이들을 쉽게 이겨왔다. 시간이 흘러 이제 첫째 아이에게는 지는 일이 많아졌으며, 둘째 아이와의 실력 차이는 많이 좁혀졌으며, 셋째 아이의 창의적인 수에 가끔씩 놀라는 상황을 직면하고 있다. 첫째에게 지기 시작하면서 체스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했고, 비싼 체스를 사고 싶다는 생각도 싹 없어졌다. 난 우리 집안의 Howard Staunton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