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우리 Jun 11. 2020

터프하다고 엘레강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런던 라이프

터프하다고 엘레강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 느끼는 풍부한 콘텐츠와 자유, 프랑스서 보게 되는 깊이 있는 예술의 품격, 독일에서 발견하는 삶의 퀄리티와 효율성, 이탈리아에서 감탄하는 화려한 유적과 역사. 중앙아시아에서는 이 모든 것을 총칭하여 유럽식 엘레강스라고 한다. 좋은 것 앞에는 EURO라는 말을 붙인다. 집을 클래식하게 수리해 놓아도 ‘유럽식 수리(에브로 리몬트)’라고 하고, 모던하게 수리해 놓아도 유럽식 수리라고 한다. 잘해 놓은 수리는 모두 유럽식 수리다.

지난해 이맘때 로얄 에스콧에 갔다. 올해는 친구들과 같이 가서 맘껏 즐기려고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행사가 취소되었다. 로얄 에스콧은 육체 노동자의 주머니를 터는 곳이 아니며, 경마장 가는 길에 죄책감을 느끼는 곳이 아니다.

로얄 에스콧에서 만난 아일랜드 아주머니는 매년 로얄 에스콧에 오지만 베팅하는 방법은 몰랐다. 더블린에서 런던으로 오는 길은 젊어서나 늙어서나 변하지 않고 설렌다고 했다. 여왕을 이미터 앞에서 보면서 일 년이 지났음을 느낀다고.

로얄 에스콧은 격조롭다. 푸른 초장에 건축된 경마장, 화려한 족보의 경주마, 세심하게 차려입은 연미복과 화려한 모자, 보이지 않을 듯 보이는 계층의 경계, 그리고 등장하는 여왕.


그렇다고 영국 경마가 모두 로얄 에스콧처럼 격조로운 것은 아니다. 리버풀의 Aintree 경마장에서 개최되는 Grand National 대회가 있다. 181년 전통의 그랜드 내셔날을 처음 본다면,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다. 영국다운 것이 무엇인가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40필의 경주마가 6.9km를 달리는 레이스다. 나무 덤블을 30번이나 넘어야 한다. 자신이 응원하는 말이 있다면 30번을 마음 졸여야 한다. 30번의 점프가 얼마나 길고 애간장 타는 일인지 짐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밴쿠버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연속되는 점프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던 마음을 떠올려 보면 된다.

첫 번째 점프부터 말이 넘어지고 기수가 나뒹굴기 시작한다. 기수가 낙마하여 혼자 달리는 말도 있고,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말도 있다. 나뒹구는 말과 기수에 걸려 또 말과 기수가 넘어지고 나뒹군다. 대부분의 말과 기수가 끝까지 경기를 마치지 못하며, 어느 대회에서는 40마리 중에 3마리만 결승선을 통과하기도 했다. 다친 말 중에 많은 수가 안락사되며, 기수도 중상을 입거나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구름 같은 관중이 몰린다. 많은 사람들이 베팅을 하지 않고도 흥분하며 경기를 관람한다.


그랜드 내셔날은 터프하다. 전 속력으로 달리면서 덤블을 넘는 말의 모습에서 엘레강스함을 느낀다. 기나긴 경주를 마무리하는 말과 기수의 기진맥진한 모습에서 엘레강스함을 느낀다. 터프하다고 엘레강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많은 동물 애호가들은 대회의 개최에 강력 반대하지만, 대회는 늘 성황리에 열리고, 대회 참가 티켓은 일 년 전에 구매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혹자는 이걸 집단 면역 실험이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던 유럽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는 실험이 아니었고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다. 우리가 유럽을 자유롭고 세련되며, 우아하고 격조롭다고 생각했다면, 좋은 것에는 다 Euro를 가져다 붙이는 중앙아시아 스타일이 몸에 밴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말이 죽는다고 기수가 죽는다고 그랜드 내셔날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인명 경시라거나 동물 학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상은 보호와 안전이 전부는 아니다. 경쟁도 흥분도 자유도 중요한 삶의 일부다. 그러다가 죽음이 오면 죽음은 문제의 끝이다.

죽음을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면 코로나는 문제의 시작이지만, 죽음이 문제의 끝이라고 보면 코로나는 문제의 끝이다. 코로나는 누군가에게는 비정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일부고, 문제의 끝이다. 죽음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만 보면 우리의 불행은 끝이 없다.

그랜드 내셔날은 매년 4월 초에 개최되고, 로얄 에스콧은 6월 중순에 개최된다. 영국을 방문한다면 이때에 맞춰 보는 것도 좋다. 그럼 영국의 장점과 단점이 소름과 함께 실감 난다.

작가의 이전글 홍범도, 소련의 고려인과 영국의 인도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