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우리 Jun 13. 2020

윈스턴 처칠과 폴란드인 배관공 레젝

영국 정치

윈스턴 처칠과 폴란드인 배관공 레젝



BLM(흑인의 삶은 중요하다) 시위가 런던에서도 도를 넘고 있다.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고, 급기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윈스턴 처칠의 동상을 훼손했다. 처칠을 우리가 잘 알지만, 런던에 와보지 않고는 그의 위상을 온전히 알기 어렵다.

웨스트민스터 애비는 영국 역사의 상징이다. 유명한 영국인은 모두 그곳에 묻혀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입구 정 중앙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게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의 표지석을 밟고 고개를 숙이면 무명용사의 표지석이 있다. 처칠과 무명용사가 영국을 구했다는 의미를 닮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애비를 나와서 템즈 강변으로 가다 보면 빅벤과 웨스트민서터 의회와 런던 아이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에서 처칠 동상을 만나게 된다. 늙고 뚱뚱하고 구부정한 모습의 동상을 처칠은 분명히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동상이어서 처칠을 제외하면 누구나 좋아하는 동상이다. 특히 뒷모습이 좋다.

 


영국인이 좋아하는 영국인 100인에 엘리자베스 1세, 아이작 뉴튼,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늘 1위를 하는 인물이 윈스턴 처칠이다. 현 총리인 보리스 존슨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도 처칠이다.

어제는 집에서 화장실 수리를 했다. 유럽식 수리를 하고 싶었지만, 예산 부족으로 조금만 손 봤다. 배관공은 인상 좋은 폴라드인 레젝(Leszek)이었다. 꼼꼼하게 일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지만, 일이 더딘 게 흠이었다. 변기 교체에 도합 네 시간이 걸렸고, 수도꼭지 두 개를 바꾸는 데에 한 시간이 걸렸고, 욕조 실리콘을 교체하는 데에 한 시간이 걸렸다. 총 여섯 시간을 화장실에서 폴란드 배관공으로부터 폴란드의 지리와 역사, 그리고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폴란드에서 역사 선생님을 했나?’ ‘난 공부를 안 해서, 아버지가 공부 안 하면 건축 노동자가 될 거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아버지 말처럼 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일이 좋다. 폴란드에서는 건축 노동자도 얄타 회담이나 포츠담 회담 정도는 다 안다.’  

그는 폴란드의 코살린(Koszalin) 출신이었다. 30년 전에 갑자기 독일인 할아버지가 자신의 집에 찾아왔다. 선물을 하나 들고 와서는 자기 집과 집 근처에서 조금만 머물다 가겠다고 했다. 낯선 독일인이었지만, 선한 인상의 할아버지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나니 할아버지가 입을 떼었다. ‘저기 있는 체리 나무는 내가 심은 것이다.’ ‘저기 보이는 저 돌담은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 높았다.’ 레젝이 살던 집은 이차대전 이전에 그 할아버지 집이었다.

이차 대전으로 폴란드 국경은 큰 변화를 겪었다. 나라 전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공간 이동했다. 로그인 과정에서 로봇이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 종이 퍼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밀어 맞추듯이, 폴란드 전체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밀렸다. 폴란드 동쪽의 땅을 소련에게 내주고, 대신에 독일 동쪽의 땅을 받았다. 독일에게 받은 땅이 소련에게 준 땅보다 작아서 체코(Czechia)만한 크기의 국토 면적을 잃었다. 그래도 준 땅보다 받은 땅이 인프라도 좋고 토양도 좋았으며, 바다에 면하는 면적도 넓었기 때문에 경제적 관점에서는 손해라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대규모 국경 변경은 많은 사람들의 강제 이주로 귀결되었다. 코살린이 바로 이차 대전 이전에는 독일이었는데, 이차 대전 이후에 폴란드가 된 도시였다. 독일 할아버지는 동유럽과 서유럽이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자 자신의 고향을 찾아온 것이었다. 임진각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는 실향민 마음이었을텐데, 결국 우리는 남북 관계를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다. 국경 하나 열지 못하면서, 날 선 비난에는 전문가인 북한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영국, 미국과 소련의 정상이 처음 만난 것은 1943년 테헤란에서다. 두 번째 만난 것은 전쟁 끝 무렵인 1945년 2월이었다. 그것이 얄타 회담이다. 마지막 만난 것은 독일이 항복한 후인 1945년 7월이었다. 그것이 포츠담 회담이다. 일년의 테헤란, 얄타, 포츠담 회담을 통해서 전후 유럽의 질서가 정해졌다.

테헤란과 얄타에서는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이 만났다. 루스벨트는 처칠을 신뢰하지 않았고, 처칠은 루스벨트와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았고, 스탈린은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신뢰하지 않았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미국 주도의 UN을 생각하고 있던 루스벨트는 대영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처칠이 마뜩지 않았다. 소련에 대한 경계심은 없었다. 미국은 이미 세계 최강국이었고, 이차대전 중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소련이 경계 대상이 아니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소련과 스탈린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특파원들은 소련에서 제공하는 향응과 러시아 미녀의 공세 속에서 소련에 대해 호의적인 기사만을 미국에 송고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자신과 보조를 맞추면서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에 반해 영국은 소련과 스탈린을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영국의 지식인은 끊임없이 소련을 방문하고 면담하고 관찰했다. 소련의 이념과 물질 공세에 마음을 빼앗긴 지식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소련과 스탈린의 위험성을 잘 간파하여 영국 정부에 전달했다. 처칠은 스탈린의 공산당이 히틀러의 나치보다 큰 위협이라고 생각했다.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은 대체로 소련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자신만만했던 루스벨트는 얄타회담 후에 사망했고, 부통령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어 포츠담 회담에 참여했다. 트루먼은 루스벨트로부터 부통령 대우를 받지 못했다. 전시 작전 회의에 한 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고, 미국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백악관에서 루스벨트를 만난 것도 두 차례에 불과했다.

스탈린을 견제하던 처칠은 포츠담 회담 중간에 총리에서 물러 났다. 회담 중에 총선 결과가 나오면서 총리가 보수당의 처칠에서 노동당의 애틀리로 변경되었다. 자연스럽게 회담의 주도권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넘어갔다. 포츠담 회담의 결과 많은 변화가 있었다. 폴란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소련이 차지하게 되었다. 대신에 폴란드는 독일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트루먼은 뒤늦게 소련의 의도를 간파했고, 트루먼과 아이젠하워가 집권하는 동안에 미국에는 매카시즘 광풍이 불었다. 소련과 미국은 사생결단의 경쟁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스탈린은 쇼스타코비치를 미국에 보내 소련을 찬양하는 선전 도구로 활용했다. 경쟁은 미국과 소련이 했지만, 희생은 쇼스타코비치가 당했고,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의 줄리안 반스가 썼다.

레젝의 폴란드 이야기에 화답하기 위해 나는 쇼스타코비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쇼스타코비치와 스탈린의 전화 대화 내용을 이야기해 주었고, 레젝은 깔깔깔 웃느라 일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 공포정치의 희생자나 쇼스타코비치 음악 팬이 레젝의 웃음에 대해 전해 듣는다면, ‘그게 웃을 일이냐?’고 정색할 수 있지만, 그는 폴란드인이기 때문에 자격이 된다.

‘러시아인과 보드카를 마시는 것은 좋지만, 같이 일하고 싶지는 않다. 영국에서 돈을 벌어 폴란드에서 의대 다니는 딸의 학비를 보내 줄 수 있어서 좋지만, 런던의 글로벌하고 거친 경쟁이 싫다. 독일에 가서 살고 싶다. 이젠 모두 지난 일이다. 독일인도 얼마든지 폴란드에 와서 살 수 있고, 폴란드인도 얼마든지 독일에서 살 수 있는 시대가 왔으니 얼마나 좋냐? 이 놈의 코로나만 없으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코로나를 틈타 처칠의 동상을 훼손하는 일은 반달리즘이다. 그리고 그러한 반달리즘은 히틀러와 스탈린으로 충분했다.’

런던에는 윈스턴 처칠도 있지만, 레젝과 같은 배관공도 있다.

작가의 이전글 터프하다고 엘레강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