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우리 Sep 09. 2020

목사와 의사, 신뢰 사회와 불신 사회

영국 의료

목사와 의사, 신뢰 사회와 불신 사회
   
   
영국에 기독교 신앙인 수는 드라마틱하게 줄고 있다. 교회와 성직자 수도 줄고 있다. 기독교인 수가 줄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아직은 드라마틱한 단계는 아니다. 요즘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영국처럼 된다. 한국은 목사와 교회 수는 증가하고 있으니 한국 교회가 헤쳐 나가야  일이  넘어 산이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의사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2012년에서 2019 사이에 8% 정도의 의사 수가 증가했고, 2018-2019년에만 4% 증가했다. 한국의 경우 2012년부터 연평균 3% 의사  증가가 있었다. 영국과 한국 모두 인구 증가율보다 의사 증가율이 높은 상황이다. 의사가 적어서 문제일  같지는 않다.

2019 입소스(IPSOS) 신뢰도 조사를 보면 재미나다. 영국은 성직자를 신뢰한다는 대답이 15%, 한국은 13%. 신앙인 수가 반등하는 것이 영국이나 한국이나 모두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의사에 대한 신뢰도 조사는  흥미롭다. 영국인이 의사를 신뢰한다는 비율은 67%. 조사대상 직업군 중에 신뢰도가 가장 높다. 한국인이 의사를 신뢰한다는 비율은 28% 영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 의사가 영국 의사보다 실력에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데, 우리는  우리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는가? 실력이 아니라 다른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인가?


모든 것이 의사 탓만은 아니다. 한국인의 타인을 신뢰하는 정도가 바닷물 수준으로 짜다. 한국인은 좀처럼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길거리 모르는 사람을 신뢰하느냐?’ 질문에 영국인은 37%, 한국인은 22%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의사에 대한 신뢰 비율은 그보다  차이가 나기에 한국 의사의 탓이 조금은 있다.

영국 사회는 신뢰 사회인데, 한국 사회는 불신 사회다. 영국은 사람의 말을 믿어주는 것에서 시작하고, 한국은 의심하면서 시작한다. 시작만 그럴 뿐 중간부터는 마찬가지 기는 하다. 그리고 신뢰는 좋고 불신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뢰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불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있어서 언어적인 표현의 한계가 있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신뢰/불신사회라는 구분에서 신뢰는 가치중립적이다. 사회가 조직되고 운영되는 원리가 다르다는 의미다.

스코틀랜드의 카누스티(Carnoustie) 왔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있는 낯선 스코틀랜드인을 가리키며, ‘ 사람을 신뢰하느냐?’ 밑도 끝도 없이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답은 여러 가지로 나올 것이다. ‘ 믿을 이유가 있나?’ ‘얼굴이 선해 보이는데 믿지!’ ‘모르는 사람을  보고 믿나?’ ‘문신이 있어서  그런데…’ 등등의 다양한 반응이 나올 것이다. 여기서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안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신뢰 사회가 불신 사회보다 좋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참여자의 행동 패턴도 다르고, 정부 정책도 달라야 마땅하다.

불신에 기반한 사회가 신뢰에 기반한 사회보다  나을 때도 많다. 코로나 사태가 대표적이다. 증상이 있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나와서 검사도 받고 자발적으로 알아서 자가 격리를 하라는 사회가 있고, 신천지 같은 감염 의심 예배에 참석한 신도의 명단을 받아서 전수 조사하여 확진자를 선별 격리시키는 사회가 있다. 전자는 신뢰에 기반한 사회고, 후자는 불신에 기반한 사회인데, 전염병의 경우 불신에 기반한 조치가 훨씬 효과적이다.

여당과 의사협회가 합의를 이뤘다. ‘코로나가 끝나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재논의하자! 일방적인 추진을 하지 않겠다.’ 신뢰 사회 기준으로 잘된 합의인데, ‘그것을 어떻게 믿냐?’ 전공의가 반대하고 나섰다. 불신 사회라서 그렇다. 이것 또한 전공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불신 사회에서 신뢰 사회 방식으로 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당이나 정부가 정책을   만들고 있다. 코로나 방역식 해법을 정부와 의사 간 협상에도 도입해야 한다. 그런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한국에서는 비트코인이 영국에서보다 인기가 있다. 그것은 비트코인이 불신의 사회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물물 교환을 하거나 현금 거래를 하거나 수표 거래를 하거나 계좌 송금을   모두 거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믿을  없으면 거래할 수가 없다. 수표는 말할 것도 없고, 계좌 송금 조차도 송금한 사람이 받은 사람의 계좌를 클레임에 의해 잠글  있다. 현금 조차도 금액이 커지면 중간에 위폐가 있을지, 불법 자금은 아닐지, 바이러스가 묻은 돈은 아닐지, 걱정이 끝없다. 비트코인은 거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필요 없다. 위폐가 없고, 수취 계좌를 잠글  없으며, 오염 여부를 따질 수가 없다. 불신자를 위한 거래 코드를 만든 것이 비트코인이 달성한 업적 중의 하나다.

사회를 돌아가게  방안이나 정책만  만든다면, 불신사회가 불편할 것은 없다. 때로는  효율적일 수도 있다. 간혹 가오가 서지 않는 측면은 있지만 가오라는 것이 워낙 주관적인 것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기도 하고, 가오가  먹여주는 것도 아니다.

혹시라도 불신 사회에서 신뢰 사회로 바꾸어 볼까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역할을 담당할  있는 직업군 중에 하나가 성직자다. 문제는 성직자가 조사 대상 직업 중에 거의 최하위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비트코인과 같은 해결책을 만들어 내야 한다.  만들면 그것도 혁신이어서 인류 사회에 기여할  있다.

성직자는  분발하시고, 의사 선생님은 우리를  치료해 주시기를...

작가의 이전글 골프의 고향에 다시 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