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양선생활

설날 소묘

by lemonfresh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깥에 하얗게 눈이 와 있었다. 잠깐 새해 소원을 빌었다. 사실 별다른 소원은 없다. 그저 온 가족이 무탈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기를 바란다.


처가에 간 아들에게 톡을 보냈다.

“눈이 많이 왔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너라.”

평상시의 설이라면 큰댁에 차례를 지내러 갔을 것인데 코로나로 인해서 차례 참례를 하지 않기로 하였고 아들은 처가에 인사드리러 갔다가 자고 오게 되었다.


남편과 둘이 떡국으로 설 아침을 먹었다. 국물은 어제 끓여놓은 쇠고기 국을 썼다. 의식으로는 새 해 새 날이지만 생활은 어제에서 이어진다.


식탁의 음식은 출처가 여럿이다. 엄마가 해주신 빈대떡, 한 동네 있는 조카딸 시댁에서 온 나박김치와 나물, 며느리 친정에서 보내주신 김, 그리고 내가 부친 전 등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딸의 전화를 받았다. 외손자 도현이에게 한복을 입힌 모습을 보여주었다. 딸도 코로나로 시댁을 가지 못했다.

밖에는 어느새 흰 눈이 다시 펄펄 내리고 있었다. 한가하게 앉아서 바라보았다. 그래도 무료해서 TV를 켰다. 앉아서 보다가 따뜻한 바닥에 누워서 보았다. 배 부르고 등 따숩고 한가하고, 부족함이 없는데 마음에는 일말의 허무함이 일었다. 이러한 무기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꼭 이렇게 편안할 때 찾아온다.

점심은 새로운 준비 없이 있는 것으로 차려 먹었다. 해마다 딱 먹을 만큼만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번번이 음식이 과잉이다. 냉장고에 더 넣을 자리가 없다. 언제 다 먹을지 모르겠다.

아들이 서울에서 출발을 했다고 전화를 했다. 내려오는 길은 크게 밀리지 않는다 하니 두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것이다. 밖에 눈이 있으니 아이들이 오면 밖에서 논다고 할 것이다. 아까는 눈이 와서 걱정했더니 지금은 눈이 녹을까 봐 걱정이다.

아들네가 와서 세배를 했다. 할아버지가 세뱃돈을 주니 호수는 지갑을 꺼내서 넣었고, 세하 것은 잠시 뒤에 바닥에 굴러 다니고 있었다. 호수는 레고를 사 보아서 돈의 효용가치를 알게 되었고 세하는 아직 그런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호수와 세하가 한참을 나가 놀았다. 한 겨울 눈 같지 않고 이번에 내린 눈은 물기가 많았고 쉬이 녹았다. 호수는 몸을 사리지 않고 놀아서 바지가 다 젖었다. 그래서 제 엄마랑 들어와서 씻고 한참을 욕실에서 놀다 나왔고 세하는 아빠랑 밖에서 한참 더 놀다 들어왔다.

저녁은 다 같이 먹었다. 호수는 저녁을 얼른 먹고 외할아버지가 사 주신 레고를 가지고 놀았다. 세하는 조기 구이랑 해서 밥을 꽤 먹었다. 지난번에 장을 보러 마트에 갔을 때 남편이 조기를 사라고 했다. 세하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호수도 잘 먹었다. 역시 할아버지 생각이 맞았다.

저녁을 먹고 나서 과일도 먹고 식혜도 먹고 다리 헤기 놀이도 하고 독 장수 놀이도 하면서 재미나게 놀았다. 아까는 집이 적막하더니 아이들이 오니 단박에 명절 분위기가 났다. 이제는 애들을 보내는 일이 남았다. 아이들이 고단해지기 전에 얼른 보내야 한다. 호수는 졸려지기 시작하면 행동이 부산해지고 세하는 울고 보채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전에 보내는 것이 상책이다. 오늘도 호수가 행동이 커지고 과해지는 것이 벌써 졸린 반응인 데다가 세하가 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해서 내가 얼른 서둘렀다. 세하가 피곤할 때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실컷 울어서 지칠 때까지 달랠 방도가 없다. 일단 차에 태우면 삼십 분 남짓 집에 가는 동안 잠이 든다고 한다. 오늘은 다행히 바이바이를 하면서 잘 갔다. 하마터면 설날부터 큰 곤란을 당할 뻔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다시 TV를 보았다. 밖에는 어둠이 내렸고 집 앞 길로는 간간이 자동차 불빛이 지나간다. 저 이들도 이제서 집으로 가는가 보다. 어디까지 가는지는 몰라도 밤길을 가야 하니 고단하겠다. 전기장판을 따뜻하게 틀고 이불 속에 다리를 넣고 TV를 보면서 지내는 편안한 저녁 한 때를 감사했다. 또 공연한 무상함이 찾아오기 전에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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