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양선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monfresh Apr 20. 2022

이름의 무게

점점 가벼워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일부


*     *     *     *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가 갑작스럽게 닥쳐오고 나서 학교에는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방역 도우미’이다. 도 교육청에서 학교로 필요한 예산을 주면 학교에서 사람을 뽑아서 쓰는 것이다. 코로나가 있는 동안  한시적으로 생긴 일이고  하루 세 시간 정도 남짓이어서 돈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래도 지원하는 분들이 있다. 이 분들이 하는 일은 주로 발열 체크, 소독 등인데 손잡이 문고리 등 불특정 다수의 손길이 겹치는 곳이나 공용 물건 등을 소독해주신다.


오늘은 특수학급을 지원하는 방역 도우미분을 잠깐 만났다. 지난번에 특수학급 관련자 간담회 때 빠져서 별도로 만난 것이다. 같이 온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학급 내의 별별 물건을 다 소독해 주신다고 한다. 어쩌다 한 번 꺼내는 교구나 장난감, 책 등을 소독 티슈로 닦아주셔서 어떤 물건이든지 아이들이 안심하고 만질 수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유치원의 도우미분들도 마찬가지다. ‘방역 도우미’라는 이름에 합당한 역할을 해 주시려는 마음에 감사를 표했다.


*     *     *     *


나는 어디를 가더라도 흔히 직업을 들키곤다. 어떻게 알았는지 물으면 쩐지 그럴 것 같았다고 하기도하고 얼굴에 그렇게 써 있다는 농담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말과 행동을 얼른 자가체크해 보곤 했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이란 이름에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교장 선생님의 이미지에도 부합해야 한다. 물론 나는 교직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수십 년간 달고 살았던 선생님이라는 이름은 이쩌면 퇴직 이후에도 나를 스스로 제하는 규범이 될 성싶다.


사람은 하나지만 이름은 여러 개가 될 수 있다. 자연인으로서의 내 이름뿐 아니라, 관계에서의 호칭, 역할을 나타내는 직명 등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이를 먹으면서 가벼워지는 것 중 하나가 이름의 무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엄마라는 이름은 아이들이 다 장성한 지금은 그다지 무겁지 않다. 할머니라는 이름을 새로 얻었지만 그 무게는 엄마처럼 크지는 않았다. ‘우리 선생님’이란 아름답이름은 교실을 나올 때 '우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은 아이들이 나를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나마 날마다 나의 하루를 바치는 지금의 직을 내려 놓고나면 자연인으로서의 내 이름 석 자도 쓸 일이 없어질 것이다.


한때는 나도 꽃처럼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러한 날들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지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내 이름들이 책갈피에 꽂아두었던 꽃잎처럼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름 없이 살면서 조용히 잊혀지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트루먼 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