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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양선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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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Apr 18. 2022

트루먼 쇼

나는 아직 진행 중이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다. 짐 캐리가 주인공인데 어느 날 자신이 실제라고 믿고 있던 일상이 '쇼'였다는 것을 깨닫고 진짜 인생을 찾아 떠난다.



60여 년 전에 시작된 영화가 있다. 아직도 메이킹 중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는 없고 제작 의도나 완성 일자 따위는 알지 못한다.


영화는 1인칭 시점이고 주요 등장인물이 몇 명 있다. 장소와 배경이 거의 반복되고 구성이 평이한 슬로우 무비다. 이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이다. 특별한 흥행요소는 없지만 평온하기 때문이다. 나는 극장에서 보는 영화로는 드라마틱한 것을 좋아하지만 내 인생 영화로는 기복이 없는 평화로운 전개를 원한다.


그래도 제작기간이 긴 만큼 장기적으로 보면 꽤 많은 스토리가 펼쳐져 왔다. 한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고, 사회로 나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또 내가 지난 길들을 지나서 다시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누구나 그러하듯 평범한 코스지만 그 하나하나의 사건들이 모두 게는 처음 겪는 일들이었고 그 속에는 각각의 사연과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다.

가끔 지나간 일을 회상한다. 지난 일은 대부분 아름답게 윤색되어있다. 당시 아팠을 일도 지금은 아프지 않다. 기뻤던 일도 이제는 곰삭아서 희미하다. 지난 일들은 이제 모두 실체가 사라진 허상이 되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만들기는 하되 상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종료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더러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단편적인 장면들이 남기도 하지만 그 무형의 기록들은 가벼워서 쉬이 흩어진다. 나는 오 년 전에 촬영이 종료된 나의 아버지의 영화 중 어떤 장면을 잠깐씩 떠올릴 때가 있다. 어린 나를 자전거 뒤에 태워 주시던 아버지, ‘옛날에 금잔디’ 노래(매기의 추억)를 가르쳐 주시던 아버지, 내가 낳은 내 딸을 소중히 안아 주시던 아버지 등등. 그 장면들은 아버지의 영화이면서 나의 필름에 찍힌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 컷들을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화로서가 아니라 내 영화의 한 장면으로서일 것이다. 그래서 필름에는 찍히지 않은, 여섯 자식들과 자신의 여러 동생들까지 돌보았, 아버지의 버거웠을 삶의 무게를 나는 잘 모르는 것이다.


이제 나의 영화에는 남겨진 새로운 스토리가 별로 없다. 지금은 나에게서 파생된 영화들이 각각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젠 제법 중반을 찍고 있는 것도 있고 이제 두 돌도 안 된 새 영화도 있다. 그들이 가끔 내 영화에 출연하면서 즐거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각각의 영화가 같은 장소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파티처럼 즐거운 일이나 또 그만큼 부산스럽고 복잡한 일이기도 하다.


지난 주말에는 출연진이 많이 나오는 촬영이 있었다.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모처럼 엄마를 우리 집에 모셔왔고, 서울서 딸네 가족이 왔고, 천안에 살면서 자주 오는 아들네 가족도 왔다. 올해도 생일케익의 촛불을 켜고 작년과 똑같은 소원을 빌었다. 해마다 나의 기원은 우리 모두의 영화가 해피 무비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앞으로 며칠간은 딸과 외손자가 있는 을 찍을 것이다. 이 장면을 며칠이나 찍을 기회는 아주 드물어서 최대한 즐거운 에피소드를 만들어 낼 생각이다.


내가 혼자서 가끔 찍는, 아주 좋아하는 씬이 있다. 장소는 주로 신정호이고 시간은 저녁햇살이 비치는 때이다.  서쪽 하늘의 구름이 붉게 물들고 수면 위에 비추인 해가 잔물결 위에 부서져서 찬란하게 빛난다. 새로 돋아난 풀과 한창 물오른 나무들이 계절을 말해준다. 곁을 스치는 사람들은 조용하고 빠르게 지나가고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걷는다. 나는 이 장면의 백그라운드 뮤직으로 쓰고자 매달 일정한 음원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다. 매일 사용하는 유*브도 무료 서비스만 이용하면서 어쩌다 한 번 쓸 음악을 위해서는 꼬박꼬박 비용을 내는 걸 보면 내가 그걸 꽤 중요하게 여기나 보다. 다른 때는 그런 생각을 잘 못하는데 음악을 들으면서 신정호를 걸을 때에는 가끔 어느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당분간의 사정이 지나고나서 나는 다시 신정호 씬을 찍으러 갈 생각이다. 필요한 소품은 휴대폰과 이어폰, 편한 신발이면 족하고 배경음악은 언제든 준비되어있다. 배우의 컨디션만 문제가 없다면 진행될 것이다. 만약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 다른 장면을 찍으면 된다. 이를테면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잔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사실주의 영화이기 때문에 실제와 다르게 연출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필요하면 주연배우 마음대로 시나라오를 변경할 수 있다는 큰 장점도 있다.


나는 내 남은 이야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하다. 나 자신의 역할 말고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이다. 나는 그들 각각의 영화에서 좋은 배역을 차지하고 싶다. 천상병 시인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하고 노래했다. 이 영화를 끝내는 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와 같다.


나는 트루먼 쇼를 찍고 있다. 나는 이게 나의 진짜 삶인 것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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