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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양선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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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Jan 16. 2023

범사에 감사하라

천당과 지옥을 오가다

* 즐거움을 기획하다

아이들의 유치원과 어린이집 방학을 맞아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아들딸 가족들을 모두 불러서 아이들을 데리고 천안 상록 리조트에 눈썰매를 타러 가는 것과  덕산 스플라스 리솜으로 물놀이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 아직 눈 상태가 좋을 1월에는 눈썰매를 타러 가고, 2월에는 물놀이를 하러 가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썰매를 타러 가기 전날에 비가 왔고 당일은 미세먼지 상황이 좋지 않아서 물놀이를 먼저 하러 가는 것으로 변경했다. 풀에는 따뜻한 온천물이 채워져 있어서 재미있게 잘 놀았다. 물놀이 다음 날은 며느리 생일 축하를 하기로 했다. 제날짜는 월요일이었지만 하루 앞당겨 다 같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로 한 것이다. 사위는 회사 일로 토요일 밤에 올라갔고 나머지 가족들은 신정호 주변의 한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     


* 딸이 마당에서 넘어졌다.

며느리 생일 축하를 위해 신정호 주변의 한 음식점에 가려고 나섰다. 집에서 차를 타려고 나오던 중 딸이 외손자를 안은 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지난번에 온 눈이 다 녹지 않고 아직 남아있었고 미끄럽게 다져져 있었다.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기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발밑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외손자는 엄마 품에서 안전했고 딸은 상당히 충격이 컸던지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일으켜 주려고 해도 자기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더 안전하겠다고 생각을 해서 그대로 좀 누웠다가 일어났다. 간신히 차에 태우고 출발을 했는데 딸이 외손자를 데리고 있기 힘들어했다. 그래서 앞자리로 보내 내가 데리고 있었고 뒤를 보니 딸은 누워있었다. 아무래도 점심을 먹고 나서 병원에 가보아야 할 듯 싶었다.      


* 딸이 의식을 잃었다.

음식점에 도착해서 나와 딸과 외손자는 먼저 내리고 남편은 우리 어머니를 모셔오기로 했다. 미사 끝날 시간에 맞춰 성당 앞으로 가기로 미리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나와 딸은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외손자를 먼저 먹여놓는 게 좋을 듯해서 ‘아기 메뉴 가능’이라고 쓰인 음식을 주문했다. 그리고 막 먹이려는 데 딸이 아무래도 힘이 드는지 식탁 위에 엎드렸다. 내가 저 기분을 안다. 어지럽고 세상이 깜깜하고 심장이 먹먹하면서 정신을 잃을 듯한 기분,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아무래도 점심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딸아이 병원을 가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여하간 얼른 식사를 이름 짓고 일어나야겠다. 누구든 빨리 좀 오면 좋겠는데 약속 시간이 아직도 삼십 분이나 남아있었다. 아들네는 케이크를 사느라 시간이 되어야 올 것이고 어머니는 이제 미사가 끝났다고 전화가 왔었다. 외손자에게 주문한 파스타를 먹이려는데 딸이 좀 이상했다. 갑자기 심장이 답답한지 숨이 막히는지 탁자 위로 숙였던 몸을 뒤로 제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눈은 떴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했다. 나는 놀라서 딸아이를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 내가 딸을 살려야 한다.

아, 지금 딸이 죽고 있는 건가? 119를 불러야겠다. 그런데 폰은 어디 있고 어떻게 하는 거였지? 얼른 딸을 살려야 하는데 119를 부를 겨를이 없다. 나는 얼른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에게 119를 좀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고 딸을 바닥으로 좀 옮겨 달라고 했다. 마침 우리 식탁 바로 옆에 아이들 놀이장이 있었고 거기에는 매트가 깔려 있어서 남자분들 좀 도와달라고 급하게 부탁을 했다. 그리고 애기를 좀 보호해 달라고 소리쳐 부탁을 하고 나는 심폐소생술을 했다. 이대로 딸이 죽으면 안 된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했다.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눈 위에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을 때 그냥 넘어진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차를 타고 나올 때 그렇게 이뻐하는 제 아들이 자기 다리를 베고 눕는 것을 하지 못하게 강력한 메시지를 낼 때 알아봤어야 했다. 음식점에 들어와서 식탁에 엎드릴 때 심각성을 알아챘어야 했다. 남편은 태평하게 어머니를 모시러 가서 아직도 오지 않는다. 아들네는 다 같이 가서 케익을 고르느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회사 일로 어제 올라간 사위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나는 오로지 혼자서 딸을 살려야 하고 외손자를 보호해야 한다. 모든 것이 다 나에게 달렸다. 나는 딸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극단적인 상황까지 생각을 했다. 만약 딸을 살리지 못한다면 외손자를 내가 기를 것이다. 절대로 외롭게 하거나 어렵게 두지 않겠다. 내가 너를 살리지 못한다면, 살리지 못한다면......


 * 119로 병원에 갔다.

어느 순간 딸이 기척을 했다.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딸이 팔다리가 저리다고 주물러 달라고 했고 물을 찾았다. 그래서 숟가락으로 물을 먹여주고 사람들이 팔다리 주무르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리고 119가 도착을 했다. 남편과 어머니도 왔다. 119 대원들이 들것에 태워서 구급차에 태웠다. 그리고 딸아이의 상태를 진정시키려고 호흡을 천천히 하라고 했다. 몸이 마구 떨리고 손발에 핏기가 떨어져 하얗게 변하면서 절절 저리는 현상이 과호흡 때문이라고 했다. 산소는 계속 흡입되는데 이산화탄소가 들어가질 않아서 그런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본인이 내 뿜은 이산화탄소를 다시 마시면서 기체교환이 원활하게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이제 딸아이가 살아난 것 같기는 했다. 그러면 혹시 아까 넘어질 때 척추가 심하게 다친 것인가? 이정도 일을 겪을 정도면 혹시 척추를 다친 것일까? 평생 다리를 못쓰게 되면 어쩌지?      


* 식구들은 식사 중

병원에 도착하자 병상에 눕히고 피검사와 뇌 검사를 한다고 했다. 소변도 받아오라고 했다. 나는 무슨 검사든 다 해달라고 했다. 일요일이었지만 그런 검사를 다 받을 수 있는 의료시스템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딸은 수액을 맞고 있었다. 보호자는 응급실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고 하기에 대기실로 나와 있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식구들이 엄마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식사 중이라고 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가. 나는 적어도 남편은 급히 병원으로 뛰어올 줄 알았다. 그런데 별일 없었다는 듯 자기들끼리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생각을 해보니 남편이 본 것은 딸이 의식을 찾은 후였기 때문에 긴박했던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딸은 안전한 병원으로 갔고, 거기에는 내가 있으니 되었고, 어차피 모인 가족 행사는 남편이 있어야 원만히 진행이 될 것이다. 나는 이해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위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사위는 딸이 지금 병원에 있다는 소리를 듣자 바로 내려오겠다고 했다.      


* 저혈압 쇼크? 그런 것도 있나?

서울서 아산 내려오는 시간이 지나고 사위가 우리 딸을 보았을 때는 딸이 제 발로 멀쩡히 일어서서 “오빠, 나 운동화 좀.”하고 말했다. 링거를 다 맞았고, 검사 결과가 나왔고 혼자서 설명을 들었고 이제 신발 신고 집에 가라는데 신발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엉덩이는 어떻다고 했는지 물어보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고 안 했다고 해서 내가 들어가 다시 확인을 했더니 의사의 말이 ‘본인이 걸을 수 있다면 문제 없는 것이다, 본인이 많이 아프지도 않다고 했다. 그러면 된 거’라고 했다. 뇌 검사도 정상, 피검사도 정상, 척추를 다친 것도 아니고, 그러면 왜 그런 긴박한 상황이 펼쳐진 걸까? 의사의 말로는 혈압 문제로 보인다고 했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우리가 심폐소생술을 했다하니 그런 문제였나, 졸도와 경련이 있었다니 뇌의 문제였나 모두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 없었단다, 아마도 처음부터 심폐소생술을 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간혹 평상시 혈압이 낮은 사람들 중에 그런 경우가 있다고 했다. 사실 딸아이의 혈압은 평소에도 90, 60 정도였고 일상생활에서는 문제가 없었는데 외부의 충격을 받으면서 혈압이 점덤 더 떨어지면서 ‘저혈압 쇼크’가 왔던 것이다. 병원에서 나올 무렵 남편이 왔다. 그래서 딸은 사위 차에 태우고 나는 남편 차에 타고 우리 집으로 다.      


* 행복한 일상

그리고 저녁 식사 때 점심때 하지 못한 며느리의 생일 파티를 했다. 미역국은 미리 준비가 되어있었고 잡채를 할 시간은 겨우 되었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음식을 해서 다 같이 먹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잘랐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하모니카를 불고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행복한 일상이 이어졌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내가 하루 낮과 저녁 사이에 겪은 일을 마음에 삭이기가 벅찼다. 점심때는 딸이 죽는 줄 알았고, 저녁때는 멀쩡하게 살아서 가족 파티에 참여를 했다. 한나절 동안 지옥과 천당을 오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나의 지옥과 천당이었었다. 딸아이도 자신이 잠깐 의식을 잃은 동안의 그 긴박했던 드라마를 기억하지 못했다. 딸에게 물어보니 어지러워서 식탁에 엎드린 것과 다시 깨어났을 때 목이 심하게 마르고 손발이 매우 저렸다는 것,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어지럽고 메슥거렸다는 것, 외손자 도현이에게 ‘엄마 괜찮다.’라고 중언부언 말한 것 등이 기억난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저혈압 쇼크'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당시 딸에게 나타났던 증상들이 다 적혀있었다.      


* 그럴 줄 알았다.

이튿날 딸이 아무래도 병원에 다시 가봐야겠다고 했다. 엉덩이를 움직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허리를 숙이거나 앉았다 일어나거나 할 때 많이 불편해했다. 나는 당연히 병원에서 엑스레이든 뭐든 엉덩이 부상에 대해 알아봐 줄줄 알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치 없이 그냥 집에 가라고 한 것이 좀 의아했었다. 그래서 다음 날 다시 그 병원에 찾아가 엉덩이 사진을 찍어 본 결과 ‘꼬리뼈가 골절되었고, 병원에서 딱히 해 줄 일은 없으며, 조심하면서 시간이 한 달쯤 지나야된다.’고 했다. 그래서 딸이 일주일을 우리 집에서 더 있다가 올라가기로 했다. 물론 일주일 가지고 다 낫지는 않겠지만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잠시 우리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남편이 퇴직하고 집에 있어서 딸에게 최대한의 도움을 주었다. 때마다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외손자에게 밥도 먹이고 놀아주고 했다. 남편이 그런 것을 잘해서 큰 도움이 되었다.      


*범사에 감사하라

평범한 행복 속에 있을 때는 그 감사함이 잘 깨달아지지 않았지만 그날 저녁만큼은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이런 일상이 실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리고 이튿날 그 감사는 다시 범사에 물들었다. 나와 가족의 안전을 확인하자 그 찬란한 감사가 빛이 바랜 것이다. 감사가 이틀을 못 넘기다니,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혼자 다시 마음에 새겼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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