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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양선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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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fresh Jan 26. 2023

어떤 기쁨

어느 날 손자 호수 축구교실에 갔다. 어떻게 하는지도 좀 보고 집에도 데려다주려는 것이다. 보통은 클럽에서 데려다주지만 어떤 애들은 엄마가 때마다 데리러 온다. 호수도 엄마가 데리러 가면 좋겠지만 동생 세하의 어린이집 하원 시간과 겹쳐서 엄마가 데리러 가지 못한다.


옆에 태우고 가는데 호수가 길가의 롯데리아 매장을 보고 말했다.

"나 저기에 가봤어. 저기서 먹는 거 좋아해요. 그런데 세하한테는 비밀이에요."

"그래? 세하는 안 갔어?"

"나는 세하보다 방학이 길어서 그때 엄마랑 갔어요."

호수는 유치원 방학 때 돌봄 교실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꽤 긴 방학을 지냈다. 그때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갔다가 가 본 것 같았다.

"어떻게? 엄마가 운전했어?"

며느리 은지는 운전이 서툴러서 되도록 운전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도서관에는 주차장이 부족해서 그게 더 큰 어려움이다.

"아니, 걸어서"

집에서 아주 가깝지는 않은데 호수는 여덟 살이 되어서 그 정도 거리는 걸을 수 있다. 엄마랑 둘이만 도서관 나들이를 한 것도, 둘이서 롯데리아에 간 것도 세하한테는 비밀이었다. 사실 세하는 오빠가 방학이어서 집에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 줄 알았다면 세하도 어린이 집에 안 간다고 했을 것이다.

"그랬어? 잘했네."

호수가 엄마랑 둘이서만 롯데리아에 갔다니, 정말 좋았겠다. 동생 태어난 이래로 호수가 엄마를 독차지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방학에 유치원 프로그램을 고사하고 세하를 어린이 집에 데려다준 다음에 엄마랑 둘이 있는 것은 호수로서는 정말 드문 기회가 될 것이다. 호수의 심정을 생각해 보니  나도 덩달아 기뻤다.


잠시 후에 아들네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래서 내가 호수에게 물어보았다.

"엄마보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라고 할까 아니면 할머니가 니네 집까지 데려다줄까?"

"할머니가 데려다주세요."

사실은 나도 그럴 참이었다. 헤어지기가 좀 아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럴까?"

"네. 그러면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어? 호수랑 할머니랑 생각이 똑같네!"

호수가 그런 생각을 할 줄 알다니 나는 무척 기뻤다.

"다음에도 할머니가 데리러 오면 좋겠어요."  그런데 내가 호수를 데리러 갈 수 있는 날은 앞으로 몇 번 안 된다. 내가 외국학생들에게 한국어 수업을 하러 천안에 갈 횟수가 네 번 정도 남았기 때문이다.

"몇 번은 더 할 수 있는데 그다음에는 시간이 잘 안 맞을 것 같아."

나는 아산 살고 호수네는 천안이라 별일 없이 데리러 가기는 좀 멀다.

"아, 그러면 할머니 시간이 맞을 때는 와 주세요."

"그래. 그러자."

그리고 할머니가 오빠를 데리러 갔다는 것은 세하한테는 비밀이다. 물론 세하를 데리러 갔던 적도 있다. 그때도 호수에게 따로 말해주지는 않았었다.


호수네 집에 올라가서 세하도 보고 며느리도 보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도 호수의 말을 생각했다.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다음에도 또 와 주세요."

건조하고 무기력한 일상에 기쁨이 스며들었다. 어느 마음 흐린 날 내 마음을 밝혀줄 처방에 쓰려고 호수의 말을 마음속에 잘 갈무리해 두었다.

"그래. 할머니가 다음에 또 갈게."

호수가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라도 갈 것이다. 그리고 호수가 할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을 날이 와도 나는 기쁠 것이다. 그건 호수가 어른이 되었다는 말이겠지. 나는 그런 날들을 기대한다. 나는 호수가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어 나에게 놀러 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어린 호수든 어른이 된 호수든 언제나 나의 자랑이요 사랑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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