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monfresh
Jan 27. 2023
나는 천년고찰 봉곡사 인근에 산다. 절에 올라가는 소나무 숲길이 아주 좋다. 솔숲을 걸어 봉곡사 까지만 가도 좋은데 그 주변으로 나 있는 산책로와 등산로를 걷는 것도 좋다. 그래서 주말이면 찾는 사람이 꽤 있다. 우리 집에서는 산책로 출구 쪽으로 접근하는 길이 가장 가깝고 저 아래 주차장으로 가더라도 차를 타고 5분이나 될까 말까 한 거리이다. 봉곡사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집 뒷산에도 산책로가 있다. 울타리를 끼고 돌면 바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 길을 몇 번 올라본 적이 있다. 봉곡사 길도 어쩌다 가기는 한다.
지난 인사이동 때 행정실에 실장이 새로 왔다. 그이는 신정호 주변의 전원주택에 산다고 한다. 신정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다. 퇴근길에 신정호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은 내가 일상에서 누리는 일종의 심리적인 사치이다. 내가 퇴근 후 신정호에서 산책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신체적 심리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당시의 아름다운 계절과 날씨, 저녁 햇살, 수면 위의 찬란한 반사, 사람들이 만든 길, 그리고 조화롭게 심어 놓은 꽃과 풀, 나무, 가로등, 주변의 이쁜 카페들, 나는 신정호에 가 있지 않을 때라도 그 풍경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가 있다.
어느 날 행정실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아, 신정호 주변에 살다니, 얼마나 좋을까!”
“네. 그런데 저는 신정호 자주 안 가요.”
“그래요? 왜? 그럼 어디 가요?”
“저는 주로 봉곡사에 가요.”
“엥? 정말? 우리 집이 봉곡사 주변인데...!”
“그러세요? 거기 숲이 너무 좋잖아요.”
“숲이 좋지요. 그런데 나는 시간 나면 신정호가요.”
이야기를 하고 보니 서로 다른 생각이면서 같은 생각이기도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내 집에 있는 파랑새를 두고서 다른 파랑새를 찾으러 나가는 게 그리 낯선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어느 곳을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어딘가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다. 보고 걷고 음악을 듣고 기쁨을 느끼는 나만의 장소, 사실 신정호든 봉곡사든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신정호는 나만의 것이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창밖에 빛이 환하니 곧 봄이 될 것만 같다. 봄이 되면 신정호도 가고 봉곡사도 갈 것이다. 나 스스로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겨울 지내기가 힘들었나 보다. 이렇게 봄이 기다려지다니 말이다. 지금쯤 신정호 물가의 버드나무들도 잎눈 틔울 준비가 한창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