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emonfresh
Dec 28. 2023
오늘은 맘먹고 휴대폰 연락처 정리를 했다. 근래 휴대폰을 해킹해서 연락처에 저장된 지인들에게 부고문자를 보내고 받는 사람들에게 악성 앱이 깔리게 하는 피싱 사건들이 있다고 해서 그렇다. 만난 지 오래되어 친분이 끊긴 사람, 일시적인 연락을 위해 잠시 저장했던 번호들, 더러는 누군지 생각이 안 나는 이름들을 리스트에서 삭제했다. 그동안 쌓아 놓기만 하고 관리를 안 해서 삭제할 번호가 상당히 많았다.
리스트를 한참 올리며 살펴보다 보니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6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생전에도 통화는 별로 안 했었다. 아버지께 여쭐 말도 별로 없었거니와 달근달근하게 안부 전화를 드리는 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 살아서 자주 뵙기는 했지만 그것도 주로 엄마가 부르셨을 때 찾아뵙고는 했었다. 김치를 담그셨다거나 반찬을 하셨거나 하면 여러 자식들 몫을 따로따로 챙겨서 부르시곤 하셨다. 집에 갔는데 간혹 아버지가 혼자 계실 때에는 인사를 하고 나서 바로 다음 말이 '엄마는요?'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버지는 엄하지 않고 자상하셨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유하신 아버지가 어떻게 혼자 벌어서 우리 육 남매를 다 키우고 가르치고 여우셨는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어려움 모르고 먹고 자고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옷을 좋아하셨다. 체격이 호리호리하니 옷태도 좋아서 내 친구들이 '너네 아버지 멋쟁이시다.'라고 했었다. 아버지는 요로결석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지 사흘 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 83세 셨다. 입원은 요로결석으로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오랜 당뇨로 인하여 전신의 장기가 다 약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하루에 만보 이만보씩 걸으시면서 운동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나서도 그 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이 엄마에게 왜 할아버지가 며칠씩이나 보이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한다. 동네 분들에게 아버지의 이미지는 지팡이와 묵주를 들고 매일 같은 길목을 지나면서 묵송을 하시는 모습이었다. 엄마가 그분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그게 무슨 소리냐, 멀쩡히 걸으면서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바로 일주일 전에도 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놀라들 했다고 한다.
갑자기 돌아가셔서 그런지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가 계실 때나 안 계실 때나 크게 다르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엄마집에는 아버지의 방이 그대로 있다. 아버지가 방에 안 계신 것은 성당에 가셨거나, 친목계에 가셨거나, 운동을 가셨거나 그래서 일 것 같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계실 때와 다른 것도 있긴 하다. 집안에서 담배 냄새가 안 나고 그때 보다 집이 더 깔끔하다.
오늘 전화번호 저장 목록에서 '아버지'를 보았을 때 불현듯 아버지를 뵌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년의 아버지는 당뇨의 합병증으로 더 이상 깔끔하지도 샤프하지도 않고 귀도 어두우셨다. 보청기를 최대성능으로 하시고도 잘 안 들려하셔서 대화가 어려웠고 티브이 볼륨을 있는 대로 크게 키워놓으셔서 더욱 어려웠다.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가 학교 행사에 오시거나 우리 선생님께 인사를 하시거나 하는 것이 좋았다. 아버지도 사람들에게 나를 자랑하시기를 좋아하셨다. 아버지 친구분들이 집에 오시거나 하면 나를 불러 소개를 하시고는 손님들께 노래를 불러드리라고 하셨었다.
내가 커서 결혼을 하고 딸과 아들을 낳았을 때 아이들을 엄마께 맡기고 출근을 했다. 그때 엄마도 엄마지만 아버지가 우리 아이들을 무척 이뻐하셨다. 퇴근을 하시면서 가끔 집 근처에 있던 어린이 집에 딸아이를 데리러 가곤 하셨는데 아버지가 손녀딸을 안고 오는 모습을 보고 이웃 사람들이 '그렇게 이쁘시냐'고 웃곤 했었다 한다.
그런데 내가 남편을 따라 예산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는 아이들을 동네 유치원에 보내고 출근을 했고 남편과 둘이 어찌어찌하며 키웠다. 당시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컸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아버지를 잊고 살았고 내 생활에서 아버지를 필요로 할 일은 없어졌다.
그런데 전화번호 리스트에서 '아버지'라는 글자를 보자 갑자기 심장에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아버지 나이 스물일곱에 내가 태어났고 서른일곱에 육 남매의 막내인 남매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났다. 자식들 말고도 아버지의 할머니인 우리 증조할머니, 그리고 삼촌 고모들이 번갈아 한 가족으로 살았다. 그런 속에서 나는 엄마의 애환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어려움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었고 그러다 보니 궁금한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당연히 그러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알겠다. 그 젊은 날의 아버지는 생활이 버거우셨을 것이다. 그리고 노년의 아버지는 쓸쓸했을 것이다. 위안이라면 자식들이 모두 자라서 아버지의 도움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이고 아버지가 쓸쓸하실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새벽에 막내 남동생의 전화를 받고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두셨고 의사가 사망선고를 했다. 큰 남동생이 아버지의 이불을 고쳐 덮어드리면서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육 년 반 흘렀고 내 전화기에 아버지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혔다.
전화번호들을 지우면서 행여나 아버지의 번호가 실수로 지워지지 않도록 주의를 했다. 아버지의 전화번호는 이제 소용이 없겠지만 아버지의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오히려 새로워진다. 나는 혼자 방에 들어와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 시공간에 젊고 멋쟁이시던 아버지와 그 울타리 안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던 어린 날의 내가 있다. 아버지가 내게 만들어주신 안전한 세상,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던 길고 평화롭던 시절에 대해 나는 감사한다. 그리고 아버지께 드리고 싶은 말씀을 생각했다.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제 일생을 잘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