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어떻게 자기 욕망을 추구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가
사실 원래 문학 작품을 많이 읽기보다는, 논픽션 작품을 더 많이 접했었다. 논픽션 작품의 경우 작가가 추구하는 이상과, 주장하는 바를 두괄식 혹은 내재적으로 포함하며 독자들이 같은 결론에 이르도록 유도하는데, 이번에 읽은 『달과 6펜스』에서 서머싯 몸은 모호한 결말에 이르게 함으로써, 독자를 결론 없는 질문 상태에 머물도록 한다. 이는 몸이 종종 사용하던 기법으로, 인물 간 갈등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고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서머싯 몸은 실제로, 자신을 “세상과 인간을 두루 관찰하는 작가”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복합적이며, 선과 악이 섞여 있고, 삶에는 절대적 진리나 도덕법칙이 제시되기 어렵다는 식의 태도를 취한 것이다. 또한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라고도 일컬어진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허위를 까발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모습을 인간적인 연민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것이다. 이런 양면성 덕분에 “몸은 인간성을 노골적으로 그리지만, 결코 전적으로 비난하거나 폄하하지도 않는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개인적으론, 독서 모임이나 독서 토론에서 의견을 나누기 좋은 책이라고도 생각된다.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의 소설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는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생애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Charles Strickland)는 안정적인 가정과 사회적 지위, 물질적 풍요를 뒤로하고 오직 예술에 몰두하기 위해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족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윤리적 기대나 사회적 규범을 완전히 배제하고, 자신의 내적 열망에만 충실한다. 이렇듯 『달과 6펜스』는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과 ‘일상적‧물질적 가치’가 충돌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제목 자체도 이러한 상징을 품고 있다.
제목 『달과 6펜스』는 “달(이상)”을 바라보다가 “발밑의 6펜스(현실)”를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즉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이상(예술)에 매진하는 태도에 대한 은유이다. 동시에 예술가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속적 안정을 희생해야 한다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해당 작품의 플롯을 먼저 살펴보자.
찰스 스트릭랜드는 런던 금융계에서 일하고 있으며, 겉으로는 평범하고 무난한 가장이다. 그러나 어느 날 돌연 예술에 대한 갈망을 채우기 위해, 가족과 안정된 지위를 버리고 프랑스로 떠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은 스트릭랜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비난한다. 그는 아내에게 ‘난 그림을 그릴 거야’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아내의 절규, 아이들은 무시한 채, 그는 마치 먼지를 털어내듯 가정을 벗어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이탈이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의 포기를 상징한다.
스트릭랜드가 보여주는 태도는 때로 매우 냉정하고 잔인해 보인다. 가족과 친구, 심지어 자신의 예술을 향한 노력에 협조해 준 사람들에게조차 인간적인 책임감이나 도의를 찾기 어렵다. 그가 오직 추구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겠다”라는 내적 충동이며, 이로 인해 타인들이 겪는 상처조차 개의치 않는다. 작중에서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병상에서 그를 간호하지만, 스트릭랜드는 그의 아내를 유혹해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이는 예술적 열정이 타인의 삶을 파괴적 희생양으로 삼는 순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파리에서부터 마르세유, 나아가 타히티에 이르기까지, 스트릭랜드는 끊임없이 떠돈다. 이는 한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좇아가며 사회적 연결고리로부터 멀어지는 ‘방랑’의 이미지이기도 하며, 동시에 예술적 영감의 근원을 찾아가는 순례와도 같은 여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마르세유에서 배부름을 위해 막노동을 하다 타히티로 떠나는 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그는 자아를 잃어가는 과정을 통해 예술적 순수성에 도달하려 한 것이다. 마치 니체의 ‘초인’이 약육강식의 사막을 건너야 하듯, 그는 문명의 잔혹성을 거쳐 원시로 회귀하는 것이다.
작품 후반에 스트릭랜드는 문명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풍경, 원시적 삶이 녹아 있는 남태평양 타히티에서 예술적 정점을 찍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단절된 채 오직 그림에만 몰두하는 삶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외로운 희생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준다. 파리에서 그는 굶주림과 빈곤 속에서도 화폭에 집착하지만, 타히티에선 원시적 본능이 폭발한다. 문명의 틀을 벗어나 피와 살의 욕망을 화폭에 투사하는 모습은, 그가 예술을 위해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암시하는 것이다. 유언도 없이 죽은 그의 시체 옆에는 타히티의 정령이 춤추는 벽화가 남았지만, 유작은 유언에 따라 불태워진다. 이는 예술가의 열정이 결실보다 과정 자체에 집중했음을 암시하며, 천재성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스트릭랜드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불태워진 벽화이다. 만약 그의 작품이 세상을 바꿨다면, 그의 이기심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소설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음으로써, 예술의 가치를 상대화한다. 오늘날이라면 스트릭랜드는 ‘나르시시스트’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자본주의적 성공 신화에 대한 침묵의 반항으로도 읽힌다. 문명이 요구하는 ‘좋은 남편, 좋은 시민’이라는 틀을 거부한 그의 선택은, 개인과 체제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스트릭랜드는 '가정과 윤리적 책임'을 완전히 뒤로하고 떠난다. 세간의 눈에는 극도로 이기적이고, 심지어 비도덕적인 보인다.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천재성이 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보여준다. 결국 “도덕적 틀에 갇히지 않고 오롯이 예술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을 예술가가 감당해야 할 운명인 것처럼 그린다. ‘6펜스’는 당대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와 안락함, 성공 등 물질적 가치를 나타낸다. 반면 ‘달’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미지의 세계이자 예술적 정점, 또는 더 높은 차원의 이상이다. 이 작품은 결국 “예술적 완성이나 이상을 꿈꾸는 자가 과연 일상적 행복과 양립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기도 한다. 예술가는 종종 천재성으로 숭배받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 혹은 주변인을 파멸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이러한 예술가상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특히 낭만주의와 후기인상주의 시대를 거치며 부각되었다. 몸은 소설에서 이러한 ‘예술가 신화’ 뒤에 감추어진 냉혹한 이면을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화자인 ‘나(작중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삶을 멀리서 관찰하면서도,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이는 예술가의 고유한 내면세계를 제삼자가 끝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시사하기도 한다.
『달과 6펜스』는 "꿈과 현실"의 충돌로 상징되는 예술가의 운명, 그리고 예술적 열망 이면에 깔린 고독과 광기를 탁월하게 묘사하였다. 일상적 행복과 사회적 가치가 무너지는 파멸적 과정을 통해, 예술이 과연 무엇이며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고자 한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 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 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미지의 어떤 것으로 몰아가는 그 불가해한 갈망을 방해하는 것이 혹시 자기 안에 들어와 있다면, 어떠한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니까 결국은 만신창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방해물을 가슴속에서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인간 같았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독자들에게 대단히 이기적인 인물로 비치겠지만, 그 이면에는 예술에 대한 압도적 열망이 자리하고 있고 이는 비단 천재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자기 욕망을 추구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가”라는 보편적인 고민을 던진다. 우리는 그를 통해 예술과 인생의 가치가 충돌할 때, 과연 어디까지가 ‘용기’이고 어디서부터 ‘파괴적 광기’인지 모호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자기 욕망을 추구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가
작품 내의 여러 충격을 주기 도하는 스트릭랜드의 기행에 대해서는 더 세세히 평가하지 않겠다. 조금 더 거시적으로 스트릭랜드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며 스스로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보자.
사실, 어지간한 비범인이 아니라면 스트릭랜드처럼 살아가기에도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 예술이나 혹은 어떤 꿈을 향해 전부를 던질 수 있는지는 결국 자신의 확신과 의지에 달려있다. 스트릭랜드처럼 극단적으로 보편적 '윤리를 무시'하려면 그만큼 자기 자신이 가는 길의 가치와 정당성을 내부적으로 확신하며 완벽하게 의심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 자기 확신이 흔들리고, 의지마저 불확실한 경우가 많으니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회의감에 휩싸일 확률이 높다.
실존주의 관점을 첨가하자면, 세상의 부조리함 때문이라도, 아무리 대단한 재능과 자기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목표의 달성이 개인의 결단과 희생만으로는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아무리 많은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 결실을 못 이룰 수도 있다는 점에서, 스트릭랜드의 결단은 보통 사람들에게 '위험한 배팅'에 가깝다. 만약 자신이 결과에 따라 스트릭랜드의 기행이 합리화되기도, 될 수 없기도 한다면(스트릭랜드의 삶의 결과물, 예술 작품이나 얻게 된 궁극적 진리에 따라 삶이 다르게 평가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자기 확신의 방해물이 되어 애초에 시작하고 지속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해야 할 것이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선 사실, 삶의 의미나 정당성은 결국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고, 남이 그것을 ‘옳다/그르다’고 평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의 예술적 몰입도 결과적으로는 그의 선택이고, 이를 미화든 비난이든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시선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불편함’을 주는 이유는,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삶을 침해할 때 발생하는 충돌 때문이다. 이때 “그 침해를 당한 피해자들도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 아닌가?”라고 볼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상호 의존과 손상이 분명 존재한다. 결국 개인 자유와 사회적 책임(기본적 윤리)의 긴장이 발생하는데, 이는 ‘내 삶을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말로만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럼 다른 사람의 자유는 어디까지 고려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자유론(On Liberty)』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자유론(On Liberty)』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흔히 ‘해악의 원칙(Harm Principle)’이라고 불린다. 즉,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하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그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해'를 어디까지 정의하느냐가 매우 중요해진다.
밀은 본래 주로 물리적 폭력이나 직접적인 강제력(법적·신체적 억압 등)을 사용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한하여 반대하였다. 하지만 밀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확장하는 흐름(조엘 파인버그 Joel Feinberg 등)과 연결하면, 해악의 범위는 더 확장되어 정서적, 경제적, 사회적 피해까지 해악의 범위로 간주한다. 현대에서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악을 구분하고자 하는데, 이를 통해 스트릭랜드를 평가하면, 스트릭랜드는 주변인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고통을 주었으므로, 이는 ‘타인의 자유’를 크게 침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적 시각으로 보더라도, 스트릭랜드의 행위를 ‘타인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는 스트릭랜드의 선택을 난해한 딜레마로 몰아넣을 수 있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따르면, 스트릭랜드의 예술이 수백만 명에게 영감을 준다 해도 아내의 상처나 블란치의 죽음 같은 극심한 고통을 상쇄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반면 밀의 질적 공리주의는 예술적 쾌락을 ‘고차원적 가치’로 승격시켜,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정신적 풍요로움을 인정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작품 내에서 스트릭랜드의 예술이 실제로 세상에 기여했는지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의 걸작들은 타히티에서 불태워졌고, 화자는 오직 천재성에 대한 막연한 경외만을 전할 뿐이다. 만약 그의 예술이 인류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면, 공리주의적 정당화는 근거를 잃게 될 것이다.
여기에 규칙 공리주의의 시각을 더하면, 스트릭랜드의 행동이 보편화될 경우 사회적 불신과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모든 예술가가 가족을 버린다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으므로, 그의 선택은 도덕적 규범으로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실존주의적 ‘개인적 책임’과 대조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저마다 책임진다”라고 말했지만, 스트릭랜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다. 결국 그가 남긴 것은 예술적 유산도, 화해도 아닌 파국적 결과뿐인 것이다. 현대의 맥락에서 이 질문은 더욱 첨예해진다. 과연 우리는 천재성의 이름으로 ‘해악’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스트릭랜드는 주변인을 '비자발적 희생'의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타인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안온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 한다면 그렇지는 않다.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예술가, 사상가, 혁신가들은 기존 질서를 뒤흔든 경우도 많았다. 때로는 그러한 충돌이 더 풍요로운 문학, 예술, 과학을 꽃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파격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나만의 위대함을 위해 남은 몰라도 된다'라는 태도는 타인에게 가혹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안정과 개인적 자유에는 끝없는 협상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미묘한 경계는 개인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실존주의적으로도, "나는 이 과정에서 충분한 의미를 얻는다"라고 하여도 타인의 의미 추구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면, 적어도 이 결과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가 생긴다. "내가 원하던 대로 살아서 좋다"와 "내가 초래한 피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개인은 자기 의미를 추구할 자유가 있지만, 그 피해 또한 개인이 책임져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끝없는 재능과 자기 확신이 있더라도, 스트릭랜드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삶에 가치를 지우는 내 가치관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무고한 타인의 자유와 삶까지 해쳐야만 이루거나 얻을 수 있는 진리나 자유라면 이것이 정말 그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 재고해 봐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만한 가치가 있더라도, 심각하게 해악을 입힌 지점에 대해서 스트릭랜드가 책임질 수 있는 여지조차 없다. 이미 망쳐버린 다른 이들의 삶을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지점들로 하여금 스트릭랜드의 삶을 옹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임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순 있었지만, 서머싯 몸은 답을 주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매일 발밑의 6펜스와 하늘의 달 사이에서 내리는 선택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몸이 우리에게 주는 모호성 아래, 스스로에게 여러 질문을 해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모호성의 미학을 즐기고 싶다면 읽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