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넘어서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단순히 읽고 끝낼 책이 아니라 사유하고, 곱씹고, 스스로의 언어로 재번역할 필요가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부별로 나누어 적어보려고 한다. 게다가, 이 책을 통독하고 쓰려고 하면 전체를 조망하는 무거운 글이 될 수 있을 거고 각 부에서 강조하는 개념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도 저하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여정 메타포를 사용함으로써 글에서 함유하는 의도를 쉽사리 파악하기 쉽지 않아 통독 자체도 어려운데, 이 자체도 사실 니체가 의도한 '사유의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 책이 난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1부는 차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선포의 서"라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이해를 강요하기보다 여정을 통해 같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생각을 흔들고자 한다. 1부에서는 위로부터 내려온 가르침 대신 산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 여정을 보여주며 주제마다 짧은 강연, 설교 형식을 취하고 있다. 1부에서는 "초인"에 대한 예고, 기존 도덕과 의지의 힘, 영원 회귀 개념에 대한 예비 설명, 언어 실험 등이 핵심 사상으로 드러난다. 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어야 남은 내용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1부 1장에서 니체는 세 가지 변신에 대해 설명한다. 낙타에서 사자,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변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낙타는 짐을 짊어지고, 사자는 낡은 명령을 부수고, 어린아이는 놀이처럼 새 규칙을 만든다. 1부 또한 '세 변신' 구조로 목차를 끊어볼 수 있다. 서곡에서 3장까지는 낙타, 4장부터 14장까지는 사자, 15장부터 22장에서는 어린아이로 나눌 수 있다. 1부 전체는 "초인을 향한 내적 혁명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며, 독자들에게도 같은 변신을 요구한다.
그대들에게 초인(超人) 1)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프롤로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의 고독을 끝내고 인간 사회로 돌아와 '초인'을 설파하지만, 군중의 조롱을 받는다. 이는 기존 가치 체계에 매몰된 대중의 한계를 드러내며, 진정한 이해자를 찾아야 함을 강조한다. '신의 죽음' 이후 새로운 가치 창조의 필요성을 암시한다. 초인은 신을 대체할 인간의 잠재적 이상형으로, 창조와 자기 극복을 상징한다.
위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현재 상태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기존의 도덕, 종교, 사회적 규범에 종속된 '마지막 인간'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창조적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을 했는가?"라는 이 질문은 수동적 삶을 비판하는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 편견, 한계를 의식적으로 깨부수는 적극적 행동을 요구한다.
신 중심의 가치체계가 붕괴된 현대에서, 인간은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초인은 이러한 창조 과정의 상징이다. 극복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생명의 충만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의지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서 '힘'은 물리적 힘이 아닌 자기 초월의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橋〕일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초인을 향한 '다리'라는 표현은 인간의 잠재성을 강조한다. 니체가 말하는 "몰락"은 부정적 의미가 아닌 변화와 희생을 의미한다. 기존의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부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의 가치가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에 있다고 보았다. 과정으로서의 삶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몰락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인생을 다시 산다 해도 같은 삶을 반복하겠는가?"라는 질문은 몰락을 긍정하는 태도를 요구하고, 이는 영원회귀와 연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위 구절들은 모두 프롤로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니체의 핵심 축인 초인 사상, 의지의 힘, 영원회귀를 압축적으로 볼 수 있었다. 목적이 아닌 '다리'라는 개념은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과 유사하지만 니체는 비합리적인 생명력을 특히 강조한다. 실패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토대가 된다.
너는 지금의 너를 넘어서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
너의 몰락이 새로운 탄생을 위한 희생인가?
이와 같은 질문으로도 축약 가능할 것 같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다. 모든 창조된 가치, 그것이 바로 나다. 진실로 말하노니 나는 원한다라는 요구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낙타는 사회적 규범, 종교, 도덕 등 기존 가치를 무조건 수용한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다"라는 말은 낙타가 창조적 주체가 아니라 기성 가치의 운반자임을 의미한다. "원한다는 요구"의 거부는 자기 의지의 포기를 의미한다. 낙타는 타율적 삶에 안주한다. 낙타 단계의 한계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한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해당 구절은 사자 단계의 각성을 의미한다. 사자는 "아니라!"라고 외치며 기존 권위에 반항한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낙타 단계에서의 복종으로 인해 자아를 잃은 상태를 뜻한다. "세계를 되찾는다"는 주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사자는 자신의 의지로 가치 체계를 부수기 시작한다.
관헌을 존경하고 그것에 복종하라. 비록 그들이 부정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라! 그래야만 단잠을 이룰 수 있다. 권력이 구부정한 다리로 잘도 돌아다니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관헌은 기존의 권력 구조(국가, 종교, 도덕 등)를 의미한다. 낙타는 부정한 권력에도 복종 하며 안전을 추구한다. 하지만 사자는 "구부정한 다리"로 움직이는 권력을 비웃는다. 이는 위선적 권위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며 "복종이 아닌 파괴하라"라는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다.
내가 꾸며 낸 이 신은 다른 모든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작품이자 인간의 망상이었다!
참으로 그들이 가장 믿는 것은 세계 너머의 세계와 구제의 핏방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몸이다. 말하자면 그들 자신의 몸이 그들에게는 물(物) 자체이다.
그대는 자아(Ich)라고 말하면서 이 말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보다 위대한 것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대의 몸이며 그대의 몸이라는 거대한 이성이다.
니체는 신을 인간이 불안과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투사, 프로젝션으로 본다. "구제의 핏방울"은 기독교의 구원론을 풍자하고 신앙이 현세의 삶을 도피하는 수단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몸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전복시킨 것이다. 칸트는 물자체를 인식 불가능한 본질로 보았지만, 니체는 몸을 유일한 현실로 격상시킨다. "정신"이나 "영혼"은 몸의 활동에서 파생된 부차적 현상인 것이다. 배고픔, 욕망, 고통 등 몸의 경험이 진정한 실재라고 본 것이다.
감각이 느끼고 정신이 인식하는 것. 그것은 그 자체 내에 어떠한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감각과 정신은 자기들이 모든 사물의 목적임을 그대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감각과 정신은 그처럼 허황되다.
플라톤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정신을 신성시한 것과 달리, 니체는 감각과 정신을 몸의 종속물로 본다. 정신은 몸이라는 장인이 만든 도구인 것이다. 도구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듯 정신도 몸의 의지(Will to Power)를 위한 수단이다. "진리"나 "도덕"은 몸의 생존 전략에서 비롯된 환영이라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기도 하다.
창조하는 몸이 자신의 의지의 손으로 삼기 위해 정신을 창조했다.
나는 그대들의 길을 가지 않는다, 그대 몸을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는 결코 초인에 이르는 다리〔橋〕가 아니다!
금욕주의, 종교적 구원, 이성 중심주의는 몸을 억압함으로써 생명력의 퇴화를 초래한다.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몸의 욕구를 긍정하고 그 에너지를 창조적 의지로 승화시켜야 한다. 몸을 부정하는 자는 "마지막 인간"(안주하며 사는 평범한 존재)에 머물 뿐, 초인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종합적으로, 3에서 4장에서는 니체의 "몸 철학"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이 구절들은 니체가 기존 철학의 이원론(정신/몸, 신/인간, 선/악)을 해체하고 생명 중심의 일원론을 제시함을 보여준다. 몸이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배고픔, 피로 등을 외면하지 말고 그 안에서 의지의 힘을 읽어라. 신이 나 전통에 의존하지 말고 몸의 충동을 예술적 가치로 승화시켜라.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 문장들을 통해 "몸을 배반하는 사상은 생명을 배반한다"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나의 선(善)이며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 그 덕은 나에게 대지의 저편이나 천국으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되어서도 안 된다. ... 그 덕은 별로 영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가진 이성도 아주 조금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이 새는 지금 내 옆에서 황금의 알을 품고 있다.”
덕은 천국이나 초월적 목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현세의 삶 그 자체에 뿌리내려야 한다. "새"는 창조적 의지의 상징이다. 덕이 "황금의 알"을 품는 것은 개인이 길러낸 가치가 미래의 성장(초인)으로 이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덕이 정적 규범이 아닌 역동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의 덕"은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자신의 가치를 땅 위에 세우는 것이 니체적 덕,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핵심이다.
천국을 향한 덕이 아닌 "덜 영리한" 현실적 덕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적 구원론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대가 성미 급한 자 또는 음탕한 자나 광신자나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자의 혈통을 받았더라도, 결국 그대의 모든 열정은 덕이 되었고 그대의 악마는 모두 천사가 되었다.
니체는 인간의 본능인 광기, 욕정, 복수심 등을 억압하지 말고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토록 주장한다. "악마가 천사가 된다"는 표현은 의지의 힘(Wille zur Macht)으로 열정을 가치 창조의 도구로 재탄생시킴을 의미하는 것이다.(복수심을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승화시킨다던가) 전통 도덕에서 "악"으로 규정된 것조차 삶의 긍정적 힘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도덕적 이원론(선/악)을 해체하려는 니체의 시도이기도 하다.
앞으로 그대로부터는 어떠한 악도 자라나지 않으리라. 다만 그대의 여러 덕 사이의 갈등에서 생겨나는 악을 제외하면.
서로 다른 덕(용기 vs 신중함 등)이 충돌할 때 그 갈등 자체가 새로운 "악"을 생성한다. 이는 덕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나친 용기가 때로는 무모함이 되고, 지나친 신중함이 때로는 소극성을 띠게 되는 것처럼. 갈등은 덕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새로운 자기 초월을 위한 계기가 된다.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과 유사하지만 니체는 합(Synthesis)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극복(끝없는 재가치화)을 강조한다.)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덕들을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덕들로 말미암아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덕은 인간을 초인의 단계로 끌어올리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기존 자아의 죽음을 요구한다. "파멸"은 안주하지 않는 성장의 필수 조건인 것이다. 예술가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이때도 자신의 과거 작품을 부술 필요가 있듯이. "덕으로 말미암아 파멸한다"는 문장은 영원회귀 사상과 연결된다. 삶의 매 순간을 최대한으로 살아내는 자만이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초인이 되기 위해선, 덕을 사랑하되, 그 덕에 매몰되지 않는 유연성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생각과 행위 그리고 그 행위의 표상(表像)은 서로 별개다. 그것들 사이에서는 인과의 수레바퀴가 돌지 않는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도덕적 책임론으로서의 인과율을 부정한다(자연적 인과는 대상 아님). "생각이 행위를 낳고, 행위가 표상을 만든다"는 선형적 논리를 해체한다.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와 "살인자"라는 사회적 낙인, 표상은 별개이다. 행위는 순수한 사건이지만, 표상은 도덕적 판단이 개입된 해석이기 때문이다. 행위는 의지의 직접적 발현이지만 표상은 사회나 도덕이 부여한 해석의 족쇄로 판단했다. 칸트의 "도덕률", 기독교의 "죄와 벌" 개념 등 이러한 개념들을 니체는 인간을 표상의 노예로 만든다고 보았다.
어떤 표상이 이 창백한 인간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행위를 했을 때 그는 자신의 행위를 감당할 만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행위를 한 후에는 그 행위의 표상을 감당하지 못했다.
"창백함"은 내적 허약함을 상징한다. 이 인간은 행위를 수행할 때에는 용기를 냈지만 행위 이후 사회가 부여한 "악인", "죄인"이라는 표상을 수용하며 자기혐오에 빠진 것이다. 여기에서 행위와 표상의 괴리가 발생한다. 행위 당시에는 자유로운 의지로 행동했지만, 후에 도덕적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를 평가한다. 니체는 이를 가치의 전도로 보았다.
"행위를 감당할 만한 자"가 행위의 순간에는 주체적이었지만,
"표상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사회적 시선에 의해 객체화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언제나 어떤 행위의 행위자로서 보게 되었는데, 나는 이것을 망상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그에게 예외가 본질로 전도된 것이다.
이는 단일 행위가 개인의 전체 정체성을 정의하는 오류를 지적한다. 한 번의 거짓말로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는 것. 니체는 이를 "예외의 본질화"라고 비판한다. 이 망상은 도덕 체계의 산물이다. 사회는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개인은 그 분류에 따라 자신을 재단한다. "나는 살인자다"라고 하는 것이 행위가 본질적 정체성으로 격상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인간은 행위 이후 표상을 통해 자신을 재해석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의지는 왜곡되기 마련이다. 이는 허위의식이다. 또한 니체는 "르상티망"(약자가 강자에 대한 분노, 질투, 원한 등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신,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이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하는데, 이는 열등감과 원한이 표상을 과잉생산한다는 것이다. "창백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도덕적 실패로 규정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행위와 그 결과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표상위 휘둘리지 않는, 아모르 파티의 정신을 갖춰야 한다. 또한 "나는 내 행위를 초월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행위는 일시적이지만 창조적 의지는 영속적이라는 초인의 태도를 갖춰야 한다.
이 구절들은 니체가 기존 도덕 체계가 인간을 "행위의 포로"로 만든다고 비판함을 보여준다. 행위는 단순한 사건이며, 도덕적 판단은 후천적으로 부여되므로 인과율의 신화를 붕괴하였다. 또한 표상의 덫에서 벗어나 자기 해석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는 내 행위 그 이상이다"라는 초인의 태도를 갖춤으로써 망상 또한 극복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우선 사물에 가치를 부여했다. ... 가치 평가란 곧 창조 아닌가. ... 평가된 모든 사물에게는 평가 자체가 보물이며 귀중품이다. 가치 평가를 통해 비로소 가치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그런 평가가 없다면 현존재라는 호두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다. 위험한 동물은 식량으로, 어둠은 공포와 같이. 니체는 가치가 인간 중심의 해석임을 강조한다. "진리"나 "선악"은 객관적 실체가 아닌 "생존 전략"에서 비롯된 주관적 창조물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기독교의 절대선과 달리 니체는 가치를 인간의 의지적 투사로 바라본다. 가치 부여는 생명력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의 발현인 것이다.
"평가하는 자"는 창조자를 의미한다. 예술가가 캔버스에 색을 입히듯, 인간은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보물"과 "귀중품"은 창조된 가치가 삶의 의미를 채운다는 은유이다. 실존적으로, 평가 없이 주어진 세계는 공허하다. 니체는 알맹이를 채우는 일조차 창조자의 사명이라 하였다.
그대들은, 좋은 명분이 전쟁조차 신성하게 만든다고 말하는가? ... 좋은 전쟁이 모든 명분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웃 사랑보다는 전쟁과 용기가 위대한 일을 더욱 많이 이루어 왔다.
우선은 전쟁을 재정의 해야 한다. 니체는 물리적 전쟁이 아닌 정신적 투쟁을 의미한다.(폭력 미화가 아님..) 이는 기존 가치를 넘어서는 의지의 힘의 표현이다. "좋은 명분"을 위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사회를 비판하며, 오히려 투쟁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정한 가치는 투쟁 과정에서 창조된다. 반기독교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는데, "이웃 사랑"을 약한 자의 도덕으로 보며 용기와 투쟁을 통한 자기 초월을 우선시한다. 마치 호메로스 시대의 영웅처럼, 도전과 승리를 삶의 본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동정을 열등감에서 비롯된 약자의 도덕으로 본다. 이는 수혜자의 존엄성을 훼손하며 구제자의 우월감을 은폐하는 것이다. 반면 용기는 주체적 행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게 한다. 예술가의 창조, 철학자의 사유, 개인의 자기 극신 모두, 용기를 전제로 한다. 프로메테우스의 불 훔치기, 과학적 혁명이나 예술적 파격 등 이는 모두 "전쟁"을 통한 진보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순종과 투쟁의 삶을 살도록 하라! 오래─산다는 것이 무슨 보람 있는 일인가! 아낌 받기를 원하면서 어찌 전사라 하겠는가! 나는 그대들을 아끼지 않으며 진정으로 사랑할 뿐이다,
여기에서 순종은 외부 권위에의 복종을 의미하는 게 아닌,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한 충실함을 의미한다. 투쟁은 내적 갈등(약점, 두려움 등)과 외적 장애(사회적 규범)를 극복하는 과정인 것이다. "오래 사는 것"은 니체의 입장에선 가치가 없다. 강렬하고 집중된 삶이 중요하다. "영원 회귀"를 통해 매 순간을 최대한으로 살아낼 것을 요구한다.
진정한 전사는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위험을 각오하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자만이 초인에 이를 수 있다. 니체의 사랑은 연민이 아닌 경쟁으로, 독자들이 약함을 버리고 강함을 선택하도록 독려한다.
이게 니체가 말하는 "투쟁으로서의 삶"이다. 투쟁은 고통이 아닌 생명력의 증명이다. 역사는 동정이 아닌 용기에 의해 쓰인다. 안주를 거부하고 위험을 통해 자신을 재창조하라.
삶이 고된 노동이며 불안이라고 생각하는 그대들도 삶에 몹시 지쳐 있지 않은가? ... 고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좋아하는 그대들. 그대들은 모두 자신을 견뎌 내지 못하며, 그대들의 부지런함은 도피이자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다. ... 그러나 그대들의 마음속에는 기다릴 만한 충분한 내용이 없다.
니체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인간이 노동을 통한 자기 소진에 빠진다고 보았다. "고된 노동"은 단순히 육체적 피로가 아니라 삶의 의미 상실에서 오는 정신적 피로를 의미한다. 이 "죽음의 설교" 장에서는 삶을 부정하는 허무주의, 니힐리즘이 만연함을 지적한다. 이는 기독교적 구원론이나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연결되며 니체는 이를 약한 의지의 증거로 본 것이다. 죽음을 갈망할 만큼 "성숙"했다는 표현은 삶에 대한 체념을 풍자한다. 니체는 이를 생명령의 퇴화로 간주하였다.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에 대한 집착은 내면의 공허를 메우기 위한 허황된 시도다. 니체는 이를 현대적 허세로 규정하였다. 현대로 치면 SNS의 끊임없는 업데이트, 소비주의, 일중독 등이 해당될 것이다. 이는 망각의 의지로, 인간이 고통스러운 자의식을 피하기 위해 외적 활동에 몰두한다고 본 것이다. 이는 "의지의 힘"이 약화되어, 수동적 삶으로 전락한 상태이다.
"순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니체의 아모르 파티와 연결된다. 삶을 믿는 자는 현재의 고통과 기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반면, "기대릴 만한 내용"이 없는 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현재에 대한 집중력도 상실했다. 니체는 이 경우 영원회귀의 시험을 통해 현재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확인하라고 권고한다.
진정한 휴식, 게으름은 내적 풍요로움에서 나온다. 예술가의 명상, 철학자의 사유와 같이. 그러나 현대인은 내면이 빈곤해 쉼조차 두려워한다. 이는 공허함과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니체는 단순한 무활동이 아니라, 의지의 재정비를 위한 시간, 자신의 가치를 재창조하는 과정으로서의 휴식인 창조적 휴식을 제안한다.
이 구절에서는 현대인이 외적 분주함으로 내적 공허를 감추려 한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분주함이 자기 자신을 속이게 하지 않도록, 멈추어 스스로 마주하는 데에서 참된 삶이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벗을 가르친다. 그 마음속에 세계가 선(善)의 껍질로서 완성되어 있는 벗에 대하여, 다시 말해 언제나 완성된 세계를 선사할 수 있는 창조적인 벗에 대하여 가르친다. ... 이제 세계는 다시 둥그런 고리를 이루며 벗에게로 되돌아온다.
미래 그리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오늘 그대의 존재 이유가 되기를. 말하자면 그대는 벗의 내부에 있는 초인을 그대의 존재 이유로서 사랑해야 한다.
"둥근 고리"는 영원 회귀를 상징한다. 창조적인 벗과의 관계에서 세계는 매 순간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 악에서 선이, 우연에서 목적이 생겨난다. 니체는 고통과 무질서조차 창조의 재료가 됨을 강조하였다.
"벗의 내부에 있는 초인"은 벗의 잠재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진정한 벗은 서로가 초인이 되도록 격려하며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미래를 창조한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사실 "지금 무엇이 되려 하는가?"이다. 니체에게 목적은 고정된 종착점이 아닌 끊임없는 도전의 과정으로, 존재 이유를 재정의하였다.
고로, 친구, 벗과의 관계에서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묻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 동반자가 돼라 하였다. "가장 먼 것"(초인의 이상)을 오늘의 행동 기준으로 삼아 현재를 미래의 재창조 도구로 사용하고, 과거를 극복하라.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창조적 관계"이다.
이는 추가적으로 반본질주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되려는 것"이다. 고정된 정체성은 환상이며 삶은 예술 작품처럼 끊임없이 개척되어야 한다. 벗과의 관계도 예술가처럼, 아름다운 긴장과 생동감 있는 갈등을 추구하라. 이는 안정이 아닌 성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그대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대가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지배하는 사상이 무엇인가이다. ... 내게 말해야 한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그대는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하고 그대의 의지를 그대의 머리 위로 율법처럼 내걸 수 있는가? 그대 자신이 그대의 율법의 재판관이 되고 복수자가 될 수 있는가?
니체는 이 부분에서 "자유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새로운 굴레에 종속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에서 벗어난 자가 자본주의, 민족주의, 합리주의 등 새로운 우상을 숭배하는 경우를 말한다. 진정한 자유는 외부 권위를 부정하는 것뿐 아니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는 무목적적 자유를 비판하는 말이기도 하는데, "자유"를 외치는 사회가 오히려 평균화된 가치에 종속될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다.
많은 이들이 기존 권위(종교, 도덕, 국가)에서 벗어나지만, 그 공백을 새로운 무질서로 채운다. 니체는 이를 허무주의적 붕괴로 본다. 도덕적 금기를 거부한 자가 향락주의에 빠지거나, 신을 버린 자가 과학적 결정론에 매몰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를 상대화하는 니힐리즘은 삶의 의미를 말살한다. 우리는 새 가치의 창조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기 입법의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가치에 대해 절대적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한다. 이는 외부의 심판자를 거부하고 내적 양심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복수자"는 자신의 율법을 위반했을 때 스스로를 심판하고 초월적 의지로 재창조할 힘을 말하는 것이다. 외부의 인정 없이 자신의 가치를 견지하는 고독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정의를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불의를 인정하는 편이 더욱 고상하다. ... 나는 그대들의 냉혹한 정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재판관으로서의 눈길에서는 언제나 형리(刑吏)와 그 차가운 칼이 엿보인다. ... 눈멀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는 사랑인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 모든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정의를!
이 구절에서 니체는 기존의 판단적 정의를 거부하고 사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의를 창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통적 도덕이 가진 냉혹함을 비판하며, 인간이 내적 풍요로움을 통해 자기 극복의 길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니체는 동정을 기반으로 한 도덕의 특정 형태, 기독교 적 정의(동정=사랑)를 약자의 도덕이라 하며 비판한다. 사회적 규범에 복종하며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오류나 편향성을 직시하는 것이 진정한 강자의 태도라는 것이다. 이는 진실성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니체의 사상을 반영한다. "풍요로워야 한다"는 것은 정신적 힘을 말한다. 자신의 결점을 인정할 만큼 자신감과 생명력이 충만해야 한다. 약자는 자신의 불의를 감추기 위해 위선적 정의를 외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재판관의 눈길"과 "형리의 칼"은 권력적 판단을 상징한다. 니체는 법률적 정의가 복수심과 억압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기독교의 "최후의 심판"이나 국가의 형별 제도는 인간을 죄인으로 낙인찍으며 삶의 의지를 약화시킨다 보았다. "눈멀지 않고 응시하는 사랑"은 편견 없이 현실을 직시하는 긍정의 힘이다. 진정한 정의는 적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해하고 초월하는 데 있다. 이 창조적 사랑은, 모든 죄와 징벌을 감내할 수 있는 포용력이고 이는 아모르 파티와 연결된다.
니체는 "재판관"을 기존 권위의 상징으로 본다. 이들을 배제한 정의는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선악"이 아닌 의지의 표현으로 보라는 것. 니체는 죄책감이 삶의 의지를 마비시킨다고 믿는다. 초인의 윤리에서는, 초인은 남을 심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법을 창조한다. 그의 정의는 "선악을 넘어선" 가치 재평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나의 죽음을,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권한다.
"죽음을 배우라! 때가 된 자는 스스로를 초월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죽음이 그대를 찾아오게 하지 말라. 그대가 죽음을 찾아가라 — 당당하게, 창조자처럼."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죽음, 이는 결론적 선언이다. 니체는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보며 단순한 생물학적 종말이 아니라 의지의 최종적 표현으로 제시한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죽음이 외부의 강제(질병, 노쇠, 사회적 압력 등)가 아닌 주체적 선택임을 강조한다. "자유로운 죽음"은 삶을 자신의 의지로 마무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창조적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삶을 예술 작품처럼 보았다. "자유로운 죽음"은 작품의 완결성을 위해 작가가 선택하는 최종적 브러시 스트로크와 같은 것이다. 전통적 죽음관은 죽음을 내세로의 통로로 격하시키거나, 의학적 실패, 공포의 대상으로 여긴다. 니체는 이 모든 태도가 삶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노예적 태도라 비판하였다.
초인은 삶과 죽음을 자기 의지로 통제한다. 초인의 죽음은 "너무 늦지도, 너무 이르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죽음조차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태도. 자유로운 죽음은 아모르 파티의 궁극적 실천이기도 하다. 또한, 죽음의 선택이 영원회귀의 긍정을 견딜 수 있어야 함을 주의하자.
이는 자살 옹호가 아니다. 니체는 생의 충만함을 다한 자의 죽음을 의미한 것이다. 허무주의적 자살, 삶의 부정과는 완벽하게 궤를 달리한다. 또한 죽음의 시기를 강조하는데, 생명력이 고갈된 상태에서의 생존의 집착은 노예적 집착으로 보았고, 미완의 상태에서의 포기는 약한 의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어떻게 살 것인가" 뿐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라 권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여기까지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의 내용과 그에 대한 해석이었다. 여러 장들을 보며 의미가 깊거나, 해석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추려 해석해보고자 하였다.
니체의 메시지는 외부 규범에 종속된 삶의 허위성을 폭로한다. 다만, 당신은 니체의 모든 사유에 동의하는가? 니체의 말처럼 모든 신은 죽었기 때문에 니체를 새로운 신으로 추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여러 번 자신만의 생각과 사유를 거쳐 본인의 언어로 읽고 소화하기를 권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