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by 유빈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산속에서 다시 내려와 세상을 탐험하며, 기존의 가치들을 더욱 깊이 있게 비판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시작한다.


초반부에선, 니체의 약자들에 대한 비판, 미감과 가치 판단, 자기 극복이 주요 주제로 다뤄진다. 이 부분에선 이원론적 사고방식(정신과 육체, 선과 악)을 해체하고 인간의 근본적인 생명력과 본능적 삶의 긍정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이는 이후의 가치 창조와 자기 극복을 위한 필수적인 토대가 된다.


중반부에선 관념론자(넓게 보자면), 지식인, 대중과 국가 등 기존 권위에 대한 비판이 주 논지다. 인간의 삶과 성장을 가로막는 기존의 모든 낡은 제도, 가치 체계, 그리고 그것을 옹호하는 지식인 및 정치 체제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해체를 시도한다. 이는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한 '공간 만듦'의 작업이자, 사자를 대변하는 단계라 볼 수 있다.


2부의 후반부에선 의지의 본질과 '구제', 영원회귀의 토대, '아이'의 최종적 의미를 다룬다. 앞선 비판적 작업 위에서 삶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시간'과 '과거'의 문제를 다루며 '영원회귀'라는 니체의 핵심 사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이와 동시에 진정한 자기 극복과 가치 창조가 얼마나 고독하고 힘든 여정인지를 보여주며 맹목적 추종을 경계하고 독자 스스로 사유하도록 촉구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여정을 쫓자면, 우선은 니체의 몸 철학과 미감을 이해하고, 가치 창조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2부에서 던지는 질문은 '허무 이후,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로 줄일 수 있다.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든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창조'는 단순한 예술 활동이 아닌,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은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는다. 삶의 유한성, 허무주의, 의미 상실 등 다양한 형태의 고통이 있지만, 이러한 고통을 회피하거나 긍정하지 않는 대신 그것을 능동적인 창조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든다. 니체의 말대로라면, 이러한 고통은 더 이상 삶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더 풍요롭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해줄 것이다.


하지만 창조는 쉽지 않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넘어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창조 과정에서 수반되는 어려움과 좌절, 자기 극복의 과정을 의미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익숙한 것을 버리고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는 상당한 고통을 동반한다. '자기 극복'과 '자기 초월',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새롭게 탄생시켜야 하는 만큼 고통스러운 변형이다. 이를 통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창조자(초인, 위버멘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약자들에 대한 비판

「동정하는 자들에 대하여」, 「성직자들에 대하여」, 「도덕군자들에 대하여」, 「천민에 대하여」, 「타란툴라에 대하여」 등의 장들은 니체가 '약자들'이라고 규정하는 특정 인간 유형과 그들의 가치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다. 이 구절들은 특히 그의 엘리트주의적 철학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이다.


니체의 엘리트주의적 철학

우선, 니체의 엘리트주의적 철학이란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이 부분부터 짚어보려고 한다.

니체가 비판하는 '약자'들은 사회 계층적 의미(프롤레타리아 등)라기보다는, 정신적이고 의지적인 나약함을 가진 자들을 말한다. 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최후의 인간', 니체가 가장 경멸하던 유형으로 고통과 위험을 피하고 안락함, 안전만을 추구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기존 가치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거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경우, 학식과 지위를 가졌다 해도 니체의 입장에선 '대중'이다.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들, 스스로 사유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 타인의 지식이나 전통에 의존하는 자들을 말한다.

'거세된 관조자들', 삶의 역동성과 본능을 부정하고 피상적인 관념이나 허구에 갇혀 진정한 삶을 직시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니체는 사실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극소수의 강인한 개인, '초인'만이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고 삶을 긍정하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의 철학은 이러한 '고귀한 영혼'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뭇 대중'이라고 해서 본인의 철학을 짊어지지 못할 것이라 단정했다기보다는, 특정한 '정신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라 이해하는 게 더 적절하다. 사실, 2부 중반부에서는 당대의 사회, 지적 엘리트들을 더 날카롭게 비판하는 구절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내게 한 행동을 용서한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악행을 했다는 것. 이것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 대한 악행은, 자신의 잠재력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 나약함과 비겁함 때문에 스스로의 이상을 포기하는 것, 외부의 권위나 타인의 시선에 갇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 삶의 고통을 회피하고 안락함만 추구하는 것, 이로 인해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를 잃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과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것. 등이 있다. 니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악행'을 개인적 차원의 용서의 문제가 아닌 근본적 문제로 조명한다.


타인에게 가한 상처는 관계 속에서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가한 악행은 자신을 '초인'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삶의 의지(Will to Power)를 부정하는 행위이자 니체에겐 어쩌면 가장 큰 비극,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아, 이 세상에서 동정하는 자들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리고 동정하는 자들의 어리석음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온 것이 이 세상 어디에 있었던가?

어리석음과 고통

니체는 '동정심' 자체를 비판하진 않는다. 이는 상대방의 고통을 진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고통을 연장시키는 행위일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동정은 때때로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한 도피처가 되거나,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이기적인 행위가 되기도 한다. 동정은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일어서, 자신을 극복할 기회를 빼앗을 수 있다.


'더 큰 고통을 가져온 것'이라는 구절에서는 동정심에 기반한 도덕 체계(특히 기독교)가 인간의 본능과 생명력을 억압하고, 허무주의를 조장하여 인류 전체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했다고 보는 니체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나는 이 성직자들과 함께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한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감옥에 갇힌 죄수이며 낙인찍힌 자들이다. 그들이 구세주라고 부르는 자가 그들을 굴레에 묶어 놓았다. 거짓 가치와 미혹의 말이라는 굴레에!

속박과 거짓 가치

해당 구절에서 특히 종교적 권위, 성직자들을 향한 니체의 뿌리 깊은 비판을 볼 수 있다. 단순히 비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놓여 있는 비극적인 상황에 대해 일종의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니체는 기독교적 가치(겸손, 희생, 금욕, 내세 지향 등)를 '거짓 가치'이자 '미혹의 말'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인간의 본능적인 생명력과 '권력에의 의지'를 부정하고, 약자들의 '원한(르상티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성직자들은 바로 이러한 거짓 가치와 미혹의 말을 전파함으로써 스스로를 굴레에 묶고, 타인까지도 속박한다고 비판한다.


도덕군자들이여, 그대들은 아직도 대가를 바라는구나! 덕에 대한 대가를, 대지에서의 삶에 대한 대가로 천국을, 그리고 그대들의 오늘에 대한 대가로 영원을 바라는가?
그리고 어떤 자들은 고상하게 고양되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덕이라고 부른다. 또 어떤 자들은 스스로 뒤집히기를 바라면서 역시 그것을 덕이라고 부른다. (중략) 누구라도 최소한 자신이 선과 악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대가를 바라는 욕망과 허위적 덕

니체는 많은 '도덕군자'들이 순수하게 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덕에 대한 '대가'를 바란다고 비판한다. 현세에서의 고통과 삶의 본능을 부정하고 내세에서의 보상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도덕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대목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진정한 삶의 긍정은 조건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의 시선, 사회적 인정 때문에 억지로 고상한 척하는 위선을 행하며, 자신의 욕망이나 본능을 억압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비판한다. 이러한 자기부정은 덕이 아니라, 나약함의 발로이다.


인간들은 너무 쉽게 '선'과 '악'을 규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타인을 재단하고 판단하려는 오만함을 비판했다. 니체는 '선악의 피안'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기존의 선악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상대적이고, 때로는 삶의 에너지를 억압할 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그대들의 정의라는 말의 뒤편에서 그대들의 복수심이 튀어나오리라. 인간을 복수심으로부터 구제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희망으로 나아가는 다리〔橋〕이며 오랜 폭풍우 뒤의 무지개다.

원한, 르상티망

'천민'의 도덕은 '원한'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강해지지 못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데 대한 분노와 좌절감을 외부의 강자나 고귀한 가치에 대한 '악'으로 돌리는 것이다. 강자의 용기와 자기 긍정을 '오만'이나 '악덕'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겸손'이나 '선'으로 미화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평등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와 다르게 말한다면 초인에 대한 나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 개의 다리와 좁은 판자 다리를 건너서 인간은 미래를 향해 돌진해야 하며 더 많은 전쟁과 불평등을 인간들 사이에 불러일으켜야 한다. ... 선과 악, 부와 가난, 고귀함과 저열함 등 가치들의 모든 이름. 이것들은 무기가 되어야 하며, 삶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거듭해서 극복해야 함을 말해 주는 쩔렁거리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

평등에 대한 맹목적 추종

니체가 '차별'을 지지한 것이 아니다.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려는 개인이 기존의 규범을 넘어서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고로 "평등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초인을 향한 능동적인 자기 극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고정되지 않은 채, 자기 자신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불평등"은 개인의 고유성, 차이, 창조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천민'들은(약자들은) 모든 것을 평균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려 자신들의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시도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평등의 구호를 외치지만 사실상 '나보다 뛰어난 자는 없어야 한다'는 시기심의 발로로 본 것이다. 이 부분에서 니체의 엘리트주의적 철학이 돋보이긴 하다.


나의 아름다움으로부터 굶주림이 자란다. 내가 비추어 주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고, 나로부터 받는 자들에게서 빼앗고 싶다. 이토록 나는 악의에 굶주려 있다. ... 그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나는 내 손을 거두고, 쏟아져 내리면서도 멈칫거리는 폭포와도 같이 멈칫거리며 망설인다. ... 나의 충만함이 그러한 복수를 생각해 낸다. 이러한 간계는 나의 고독으로부터 솟아난다. 베풂에서 오는 나의 행복은 베풂으로써 죽었다. 나의 덕은 넘쳐흐름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싫증이 났다!

'악의'에 대한 역설적 긍정과 베풂의 종언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은 선하고 베푸는 것과 연결되지만, 여기에서는 정반대로 '악의'와 '빼앗음'에 대한 굶주림으로 나타난다. 이는 기존의 선악 개념을 전복하려는 시도이다. '악의'는 단순히 타인에게 해를 끼치려는 부정적인 감정을 넘어 나약하고 수동적인 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의 안락함을 흔들어 깨우려는 의지를 의미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에게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고 멈칫거리는 폭포처럼 망설인다. 이는 맹목적 베풂, 동정심이 오히려 상대를 약하게 한다는 비판적 관점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악의'는 결핍이나 분노에서 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넘쳐나는 '충만함'과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독 속에서 이러한 '간계', 즉 기존 도덕에 대한 도전적 태도를 숙고한다. 이는 나약한 동정심에 대한 '복수'이자 강한 자들이 스스로를 지키고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역설적 방법으로 사용된다.


사실, 초인의 내면은 너무나 충만하여 누구에게 '주는 것' 조차 지겹고 피로하게 느낀다. 자기 과잉에서 오는 정서적 충돌이다. 그래서 주는 기쁨조차 고통으로 바뀌는 역설이기도 하다. 즉 나누고 베풀고 싶으면서도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는 자기 내부의 모순된 감정을 보이기도 하다. 이는 초인이 너무 흘러넘쳐서, 다시금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 함을 의미한다.


자기 의지와 자기 극복

나를 죽이려고 사람들이 그대들의 목을 졸랐다, 그대 나의 희망을 노래한 새들이여! 그렇다. 그대 가장 사랑하는 자들이여, 악의는 언제나 그대들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내 심장을 꿰뚫기 위해! 그리고 적중시켰다! 그대들은 언제나 내가 충심으로 사랑한 자, 나의 소유, 나를 사로잡은 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그대들은 젊어서 죽어야 했다. 너무도 일찍!
그렇다. 내게는 상처 입히지 못하는 것, 결코 파묻어 버릴 수 없는 것, 바위라도 뚫고 나오는 것이 있으니, 나의 의지가 그것이다. 이 의지는 말없이, 변함없이 세월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나의 의지, 나의 오랜 의지는 나의 발로 걸어간다. 나의 의지는 굳세며 상처 입지 않는다.

상실과 의지의 불멸

'나의 희망을 노래한 새들', '가장 사랑하는 자들', '내 심장을 꿰뚫기 위해 활을 쏘았다', '젊어서 죽어야 했다', 이 비유들은 차라투스트라가 사랑하고 믿었던 존재들 혹은 이상이나 꿈들이 외부의 '악의'나 냉혹한 현실로 인해 좌절되고 사라졌음을 암시한다. 이는 스승이나 친구, 혹은 그가 열정을 바쳤던 어떤 가치들이 시대의 비난이나 오해 속 좌절되었음을 표현하는 비극적 부분이다.


이 상실들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에게는 결코 꺾이지 않는 불멸의 의지가 있다. 이 의지는 어떤 비난이나 절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마치 바위를 뚫는 강인한 생명력처럼 존재한다. 또한, 이는 외부의 상황에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확고부동한 힘이기도 하다. 니체가 강조한 '권력에의 의지'가 가진 자기 보존 및 자기 초월의 능력을 의미한다. 개인적인 상실과 고통 속에서도, 진정한 의지는 꺾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최고의 현자들이여, 그대들의 위험은 강물에 있지 않고, 그대들의 선과 악의 종말에 있지도 않다. 오히려 저 의지 자체, 힘의 의지, 무진장으로 샘솟는 삶의 의지가 그대들의 위험이다.
생명 넘치는 것으로 하여금 복종하면서 명령을 내리고, 명령을 내리면서 복종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무엇인가?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의 눈길이 있는 곳에도 지배자가 되려는 의지가 있다. 이때 보다 약한 자는 샛길로 보다 강한 자의 성(城)으로, 심장으로 몰래 숨어들어 거기에서 힘을 훔친다. 삶 자체가 내게 비밀을 말해 주었다. “보라, 나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힘의 의지, 위험과 삶의 동력

'강물'은 외부적 위협이나 불확실한 환경, '선과 악의 종말'은 도덕적 가치 체계가 붕괴하는 혼돈의 시대를 말한다. 이런 것들은 궁극적 위험이 아니다. '힘의 의지' 자체가 가장 큰 위험이다. 이 의지는 선악의 구분을 넘어선 강력한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거나 제어하지 못한다면 파괴적일 것이다. 또한 이 의지는 끝없이 자신을 넘어서려 하기 때문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편안함을 깨뜨린다. 하지만 이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잠재력을 억압하게 되므로 양면성을 지닌 힘이기도 하다.


니체가 말하는 '권력에의 의지'는 단순히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명령하며(자기 통제), 동시에 그 명령에 복종하며(자기 규율) 이를 통해 자신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진정한 힘이란, 수동적인 복종 혹은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기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또한 기존 도덕에 대한 해체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숭고한 사랑이나 희생, 봉사와 같은 감정 속에서도 '지배자가 되려는 의지', 권력에의 의지가 숨어있다고 본 것이다. '보다 약한 자'가 겉으로는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유발하여 강한 자의 힘을 약화시키기고 그들의 의지를 갉아먹으려 한다는, 르상티망의 도덕과 연결된다.


내가 투쟁이어야 한다는 것, 생성과 목적과 여러 목적들 간의 모순이어야 한다는 것. 아, 나의 이러한 의지를 알아차리는 자는 나의 의지가 얼마나 구부러진 길을 가야 하는지도 알리라!
무상(無常)하지 않은 선과 악.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의 복잡성, 무상한 선과 악

'의지'는 단순하고 직선적이지 않다. 끊임없는 '투쟁'과 '모순'이 점철되어 있는 것이다. 삶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것이며 다양한 '목적들 간의 모순'을 안고 있다. 이러한 복잡성을 이해하는 자만이 '구부러진 길', 쉽지 않고 예측 불가한 삶의 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니체가 삶의 단순화를 거부하고 복잡성과 모순을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니체의 도덕 상대주의, 선악의 피안 사상을 드러내는 문장이기도 하다. 절대적이고 영원불멸한 '선'과 '악' 사실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시대와 문화, 각 개인의 삶의 의지가 발현되는 방식에 따라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선'이 알고 보면 약자들의 르상티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악'이던 것들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잠재력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넣어 봤다.


나는 그의 튼튼한 황소의 목덜미를 사랑하지만, 이제는 천사의 눈도 보고 싶다.
그는 자신의 영웅적 의지도 망각해야 한다. 바라건대 그가 고매한 자를 넘어 고양된 자이기를. 에테르가 그를, 의지하지 않는 자를 드높이 고양하기를!

황소의 목덜미로 상징된 '영웅적 의지', 즉 강한 자기주장과 투쟁의 의지마저도 사실 궁극적으로 넘어서야 할 대상이라 제시한다. 이는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니체에게 진정한 초월은 자신의 강점마저도 초월하여 더 큰 자유와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 너무 강한 의지는 자신을 얽매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테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하늘을 채우는 순수하고 영원한 물질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초월적이고 순수한 정신적 에너지, 혹은 우주적인 힘을 상징한다.


"의지하지 않는 자를 드높이 고양하기를"은 앞서 언급된 '영웅적 의지를 망각해야 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지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개별적인 의지나 욕망에 얽매이지 않고 더 큰 흐름이나 존재의 본질에 자신을 맡기는 경지를 의미한다. 이는 궁극적인 자유와 초월의 상태를 나타내며, 이때야 비로소 '에테르'와 같은 초월적인 힘이 그를 더 높이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란 니체의 염원을 담고 있다.


지나가 버린 것을 구제하고 모든 그러했다를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바꾸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구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의지는 과거로 되돌아가 의욕할 수 없다. 의지가 시간을 부수지 못하고 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슬픔이다.
‘의욕’하는 자 자신에게는 되돌아가서 ‘의욕’할 수 없음으로 인한 고뇌가 있기 때문에 의욕 자체와 모든 삶은 징벌일 수밖에 없다!

의지의 원한

의지는 미래를 향해 '의욕'하고 창조하지만, 과거를 바꾸거나 '의욕' 할 수는 없다. 과거는 이미 결정된 '그러했다'의 영역이며 의지의 통제를 벗어난다. 이러한 시간의 비가역성이 의지에게는 가장 외로운 슬픔이자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로 다가온다.


이 슬픔이 발전하면 원한이 된다. 의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해 분노하고, 그 분노가 원한으로 변질된다. 과거에 있었던 것은 의지가 아무리 노력해도 움직일 수 없는 '돌'과 같다.


이러한 '원한에 찬 의지'는 자신을 굴복시킨 과거에 직접 복수할 수 없기에, 자신과 같이 원한을 느끼지 않는 것, 즉 '현재'나 '미래', 혹은 다른 무고한 대상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 이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거나, 타인을 비난하거나, 혹은 현실의 고통을 피하려 하는 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니체는 기독교의 '내세주의'나 '복수심'을 이러한 원한의 결과로 보았다.


이러한 고뇌 때문에, '의욕'하는 행위 자체가 고통스러워지고, 모든 삶이 징벌같이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허무주의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다.


니체는 의지가 시간을 되돌려 의욕할 수 없음, 즉 과거의 비가역성까지도 궁극적으로 긍정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구제'의 핵심이자 그의 핵심 사상인 '영원회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의지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과거의 모든 '그러했다'를 자신의 삶의 필연적인 부분이자 스스로 '의욕했던' 결과로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에 대한 원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재평가하는 주체적이고 정신적인 행위인 것이다.


이 개념은 '영원회귀(eternal recurrence)' 사상으로 완성된다.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삶, 지금 겪는 모든 고통과 기쁨, 모든 순간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상상했을 때, 이 모든 삶을 조건 없이 긍정하고, '이 순간이 다시 오기를'이라고 외칠 수 있다면, 비로소 원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삶을 긍정하는 '초인'이 되는 것이다.


미감과 가치판단

벗들이여, 그대들은 미감(美感)이나 기호(嗜好) 때문에 다투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삶이란 모두 미감과 기호를 둘러싼 싸움일 뿐이다!
미감. 바로 그것은 저울추이자 저울판이며 무게를 다는 자다. 슬프도다, 저울추와 저울판과 무게를 다는 자를 둘러싼 싸움도 없이 살려고 하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여!

미감은 가치 판단의 기준

니체는 미감과 기호가 단순한 개인적 선호의 영역이 아닌, 삶의 방향과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임을 강조한다. 미감과 기호 때문에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 반대하며 오히려 이러한 '다툼'이 삶의 본질적 활력이자 역동성이라 주장한다. 여기에서의 '싸움'은 물리적 충돌보단, 각자의 가치와 이상을 추구하고 관철하려는 주체적 노력을 말한다.


미감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평가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기준임을 명확히 제시하였다. 우리가 무엇을 좋다고 여기고, 무엇을 추구하며, 무엇을 거부할지 결정하게 하는 내면의 척도이다. 도덕적 판단, 예술적 취향, 심지어 삶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가치 판단과 가치 창조의 투쟁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삶이 불가능하다. 단순히 주어진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의 고유한 미감과 기호를 발전시키지 않는 삶은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않은 것과 같다는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그의 표정은 아직도 어둡다. 그의 손의 그림자가 얼굴 위에 어른거리며, 그의 눈빛은 아직도 그늘져 있다. ... 그의 행위 자체가 아직도 그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그의 손이 행위하는 자를 어둡게 가린다. 아직도 그는 자신의 행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표상과 행위에 대한 극복

'그'는 아직 완전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으며, 내적인 고뇌나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한다. '손의 그림자가 얼굴 위에 어른거리며', '눈빛이 그늘져 있다'는 것은 내면의 그림자, 즉 과거의 행위나 생각, 혹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그를 짓누르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우울이 아닌, 극복해야 할 무언가가 내면에 자리 잡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의 행위 자체가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은 그가 과거에 행했던 일들, 혹은 그 행위의 결과와 의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장에서의 '창백한 범죄자'와 같은 궤도에 있는 것이다. 능동적인 의지나 행위 자체가 오히려 자신을 얽매는 그림자가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무언가를 행했지만, 그 행위가 그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거나 완성시키지 못하고 부담이나 족쇄가 되고 있다.


니체에게 극복은 매우 중요하다. '행위를 극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잊는 게 아닌, 과거의 행위가 자신을 정의하고 구속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해당 행위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며, 그를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는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상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모든 의지를 가지고 의욕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내가 사랑하고 몰락하려고 함으로써 하나의 상(像)이 단지 하나의 상으로만 머물지 않는 곳에 있다.""사랑한다는 것과 몰락한다는 것. 그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짝을 이루어 왔다. 사랑에의 의지. 그것은 죽음조차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대 비겁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의지와 몰락에 있는 아름다움

니체에게 아름다움이란 정적이고 관조적인 대상이 아니다. 강렬한 의지와 열정으로 무언가를 '의욕'하고 그 의욕을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몰락'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곳에 있는 게, 아름다움이다. '몰락'은 파괴나 소멸이 아닌 자기 초월을 위한 자기 부인, 위험 감내, 혹은 기존의 자신을 넘어서는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이 단순히 관념으로만 머물지 않고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적극적인 의지와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사랑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때로는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맹렬한 의지로 본다. 진정한 사랑은 편안하고 안전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닌, 위험과 고통 심지어 종말의 가능성까지도 포용하는 용기 있는 행위이다. 이는 비겁자들이 결코 도달 불가능한 경지이다.


기존에 대한 비판

“우리는 전적으로 현실주의자이며, 우리에게는 신앙도 미신도 없다.” 그러면서 그대들은 가슴을 불쑥 내민다.아, 내밀 가슴조차 없으면서 말이다! 그렇다. 그대들이, 알록달록한 반점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지금까지 신앙의 대상이 된 모든 것의 그림일 뿐이다! 그대들은 신앙 자체를 부정하며 배회하는 자들이며 모든 사상의 뼈를 탈골시키는 자들이다. 나는 그대들을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대 현실주의자들이여!

'현실주의자'에 대한 니체의 비판

우리는 전적으로 현실주의자이며, 우리에게는 신앙도 미신도 없다."라는 부분은 현대인의 환원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니체의 통렬한 비판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믿고, 그 외의 모든 것(신앙, 미신, 이상 등)을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니체는 이를 내밀한 가슴, 즉 깊은 이상이나 가치를 품을 용기조차 없는 상태로 본다.


"알록달록한 반점을 가진 자들"이라는 표현은 이들의 사상이 일관성 없이 파편적이고, 깊은 뿌리나 본질적인 신념이 없음을 비판한다. 이들은 과거에 인류가 추구했던 모든 이상과 신념의 '그림'에 불과하다. 스스로 가치를 창조할 능력이 없어,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껍데기만 모방한다는 의미이다.


"신앙 자체를 부정하며 배회하는 자들이며 모든 사상의 뼈를 탈골시키는 자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모든 가치와 사상을 해체하고 부정하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마치 뼈를 다 뽑아버려, 스스로 설 수 없게 만드는 것처럼 생명력 없는 허무주의에 빠져있음을 비판한다.


니체는 이러한 자들을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자들'이라 규정하며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신앙'(여기에서 신앙은 종교적 신앙 이상의 삶의 목적, 가치, 이상에 대한 확고한 믿음 등을 의미)이나 창조적 의지를 상실한 존재임을 비판한다. 그들은 물질적 현실에 갇혀 더 높은 차원의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며, 이는 니체가 가장 경멸했던 허무주의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채 저 머나먼 바다에 있는 아이들의 나라만을 사랑할 뿐이다. 나는 나의 돛에게 명령하여 그 나라를 찾고 또 찾는다.

초인의 세계

'아이들의 나라'는 니체의 '세 가지 변신' 중 마지막 단계인 '아이'의 상징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기존의 낡은 가치들이 붕괴하고 허무주의가 만연한 시대에서, 니체는 '아이'의 정신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긍정적인 삶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이 '아이들의 나라'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이상적 상태이자 목표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니체가 지향하는 '초인'들이 살아갈 세계, 기존의 가치를 넘어선 존재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창조하는 이상적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나의 이 비유는 그대 예민한 위선자들을 겨냥한다. 그대 순수–인식을 하는 자들을!
지상의 것을 경멸하라고 사람들이 그대들의 정신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대들의 내장까지 설득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 내장이 그대들에게 가장 강력한 것이 아닌가!

니체의 몸 철학

'예민한 위선자들', '순수-인식을 하는 자들'은 관념론자나 이원론자(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여 정신을 우위에 두고 육체를 하등 하게 여기는 철학적 전통을 따르는 자들을 말함. 대표적으로 플라톤주의,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있다), 지상의 것을 경멸하는 자들(현세적 삶과 육체적 욕망, 감각적 경험을 부정하고 초월적 이상이나 내세적 가치만 숭고히 여기는 자들을 말함), 위선자들(고상하고 순수한 정신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자신의 육체적 본능과 욕구를 억압하거나 기만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그대들의 내장까지 설득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 내장이 그대들에게 가장 강력한 것이 아닌가!'라고 일갈하며, 인간의 본질적인 힘과 진실은 '내장', 즉 육체적 본능, 감각, 욕망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니체의 몸 철학이기도 하다. 니체에게 몸이란, 단순히 정신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모든 인식과 가치 판단의 출발점이다. 몸을 '위대한 이성'이라고 부르며 정신은 몸의 작은 도구일 뿐이라 말하기도 하였다.


정신만을 중시하고 육체를 경멸하는 태도가 인간의 본질을 왜곡하며, 이는 결국 위선과 무기력으로 이어진다는 니체의 몸 철학적 비판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사상들과 함께 그들의 머리 위를 걸어 다닌다. 그리고 내가 설혹 자신의 과오들을 밟고 걸어 다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가 그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은 감히 알지도 못한다!

여기서 '그들'은 앞에서 니체가 비판했던 '예민한 위선자들', '순수-인식을 하는 자들', '거세된 관조를 하는 자들', 즉 삶의 본능과 욕구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치 창조의 의지 없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지식인이나 대중을 의미한다.


'그들의 머리 위를 걸어 다닌다'라는 구절에서, 차라투스트라(니체)가 그들이 사는 방식이나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며 그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강한 선언이다. '사상들'은 단순히 지적 내용을 넘어, 차라투스트라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 창조적 의지를 의미한다.


'자신의 과오들을 밟고 걸어 다니더라도', 이 부분은 니체의 자기 초월적 태도를 보여준다. 설사 자신이 실수를 저지르거나 과오를 범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런 시도나 위험 감수 없이 안전한 곳에 머무는 반면, 차라투스트라는 과오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끊임없는 자기 극복을 마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실수는 삶의 역동성과 새로운 가치 창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나갈 동력이 된다. 반면 실수 자체를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나약한 존재를 경멸하기도 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가 그렇게 말한다.' 이 문장은 확실히 니체의 강력한 불평등론을 담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강조하는 '평등'의 개념 맞다. 그에게 평등은 개개인의 잠재력과 위대함을 깎아내려 평균적인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시키는 위험한 개념이었다. 진정한 '정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거짓된 주장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과 가치에 따라 불평등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제자가 대답했다.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믿습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믿음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더욱이 나에 대한 믿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니체도 신이 아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제자의 "나는 차라투스트라를 믿습니다"라는 말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는 것은,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조차 거부하는 니체의 모습을 의미한다. 니체는 어떤 절대적인 권위나 교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진리를 찾아나가는 주체적 태도였다. '믿음'은 사유를 멈추게 하고, 나약한 자들이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도피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어떻게든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되고 있지만 손에 닿지도 않는 이 모든 것에 나는 얼마나 지쳤는가! 아, 나는 정말로 시인들에게 신물이 난다
시인의 정신은 관객을 원한다. 그것이 비록 물소일지라도! 그러나 나는 이 정신에 지쳤다. 나는 이 정신 자체가 자신에게 지치는 때가 다가오는 것을 본다. 나는 시인들이 이미 변하여 이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정신의 속죄자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속죄자들은 시인들로부터 성장한 것이다.

시인(예술가) 비판

여기서 '시인'은 단순히 시를 쓰는 사람뿐 아니라, 허구적인 세계를 창조하거나, 현실을 미화하거나, 혹은 진실을 은폐하는 모든 종류의 창작자 또는 사상가를 대변한다. 이러한 '거짓말'은 때로는 아름답고 위안을 주지만, 진정한 삶의 본질이나 고통스러운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한다고 보았다. 사실 니체의 궁극적 목표는 이러한 '거짓말'의 베일을 벗어내고 인간 존재 심연에 있는 '권력에의 의지'와 같은 본질적 진실을 직시하는 거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정신은 관객을 원한다. 그것이 비록 물소일지라도!'라는 말은 시인(즉, 허구와 환상을 창조하는 자들)의 본질적인 한계를 드러낸다. 비판적 사고 없이 자신의 작품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매한 대중이더라도 상관없다는 냉소적 시선이다. 이는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기보단, 타인의 인정이나 관심에 목메는 시인들의 나약함을 비판한다.


니체는 이러한 시인의 정신에 지쳤으며, 그들이 스스로에게 지치는 순간이 올 것이라 보았다. '시인들이 이미 변하여 이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과거의 허구와 환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과 진실을 직시하기 시작하는 시인의 변화를 의미한다.


'정신의 속죄자'는 시인들로부터 성장한 존재들이다. '속죄자'라는 단어는 자신의 과거의 '거짓'이나 '환상'을 깨닫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며, 진정한 의미의 진실과 삶을 직시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더 이상 대중의 박수에 연연하지 않고, 내면의 진실을 탐구하며 스스로를 초월하려 한다. 이는 니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초인'을 향한 진화의 한 단계로 볼 수 있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인지하고, 현실의 고통과 진실을 감당하려는 의지를 가진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나 왕들과 교회들 그리고 노쇠하여 덕이 쇠약해진 모든 것들에 대해 나는 이렇게 충고한다. 차라리 전복당하라! 그대들이 다시 생명을 얻고 그대들에게 덕이 다시 생겨나도록!
너와 마찬가지로 국가란 위선적인 개다. 너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연기를 뿜고 울부짖으며 연설하기를 좋아한다. 너와 마찬가지로 사물의 배〔腹〕로부터 말하고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다. 어쨌든 국가라는 것은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도 국가를 그렇게 생각한다.
황금과 웃음. 그는 이것을 대지의 심장으로부터 가져온다. 너도 알아 두라. 대지의 심장은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왕, 교회, 국가에 대한 비판

니체의 기존 권위와 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왕들과 교회들'은 단순히 특정 정치 체제나 종교 기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오래되어 낡고 생명력을 잃었으며, 더 이상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가치를 제공하지 못하는 모든 형태의 권위, 제도, 관습, 그리고 도덕 체계를 상징한다. '노쇠하여 덕이 쇠약해진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이 이를 명확히 한다.


이러한 낡은 것들이 스스로 붕괴하고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점진적 개혁보다는 급진적인 파괴와 전복을 통해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전복의 궁극적 목표는 파괴 자체에 있지 않다. 오히려 파괴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과 진정한 '덕'(기존 도덕이 아닌 권력에의 의지에 기반한 강인함과 창조성)이 다시금 솟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는 겉으로, 국민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기만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존재로 묘사된다. '연기를 뿜고 울부짖으며 연설', 이는 국가가 허세와 과장된 수사나 선전을 통해 자신의 중요성을 과시하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다. '사물의 배로부터 말한다', 즉 진리나 본질에서 나온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기만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스스로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권위가 되려 한다. 그리고 대중은 이러한 국가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 니체는 이러한 현상을 인간 개개인의 잠재력과 자유를 억압하는 가장 위험한 형태의 우상 숭배로 본 것이다. 국가는 인간의 정신적, 개인적 성장을 방해하고 '최후의 인간'을 양산하는 주범이라고 보았다.


사실, 그렇다고 니체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는 아니다. 국가 자체의 소멸이나 모든 권력의 부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국가가 위버멘쉬의 탄생과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존의 낡은 국가를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나 질서가 필요하다고 보았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이제 관들로부터 아이의 웃음이 영원토록 솟아오를 것입니다. 이제 거센 바람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영원토록 모든 죽음의 권태를 엄습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신 자신이 이것에 대한 보증인이며 예언자입니다! ... 저 예언자도 내 곁에서 먹고 마시게 하라. 참으로 나는 그에게 그가 익사할 수 있는 바다를 보여 주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해몽자 역할을 한 제자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자는 차라투스트라를 미래의 '보증인'이자 '예언자'라 칭하며 칭송한다. 이는 그가 새로운 시대를 열고 인류를 새로운 가치로 이끌어갈 선지자적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의 희망찬 예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며 '잔치'를 명령한다. 이는 그의 사상이 가져올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환영과 기존의 고통, 혼란, 허무주의를 '악몽'처럼 씻어버리자는 의미이다. 과거의 그림자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미래를 긍정하고, 축제처럼 즐기자는 것이다.


'예언자'는 앞서 차라투스트라에게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언했던 '해몽자' 역할을 한 제자를 지칭한다. 이 구절은 중요하고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긍정적 해석으로는, '익사할 수 있는 바다'는 무한한 가능성, 심오한 진리, 혹은 압도적인 삶의 긍정을 상징할 수 있다. 제자가 꿈꾼 이상적인 미래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바다'처럼 거대하고 광활하다는 의미이다.


경계적 해석으로는, 니체는 이 표현을 통해 '믿음'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익사할 수 있다'는 것은 제자가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이나 해석 속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자율적인 사유와 자기 극복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는 차라투스트라의 사상을 자신의 틀 속에서 너무 낙관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너무 단순하게 해석해 버렸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에게 진정한 진리는 때로는 압도적이고 위험할 수 있으며, 맹목적인 믿음은 오히려 개인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고개를 가로저은 행동, 이게 핵심적인 함의를 담고 있다. 제자가 차라투스트라를 너무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며, 그의 사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버린 것에 대한 불만이나 경계심을 보이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너희 자신을 따르라'라고 말했듯이, 제자들이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아이의 정신'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 일 수 있다. 제자가 현재의 이해에 만족하고 '완성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은 니체가 추구하는 끊임없는 자기 극복과 가치 창조의 과정에 대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인 관계

사실 하나의 장일뿐이지만,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점이 재미있어서 가져왔다.

나는 인간들 사이에서 마치 인간들을 모르는 것처럼 장님으로 산다. 나의 손이 확고부동한 것을 잡고 있다는 믿음을 전적으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그대 인간들을 알지 못하며, 이러한 어둠과 위안이 종종 내 주위를 둘러싼다. 나는 온갖 악한들이 오가는 성문 옆에 앉아서 묻는다. 누가 나를 속이려 하는가? 사기꾼들을 경계하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를 기만 해 버린다는 것. 이것이 대인 관계에서의 나의 첫 번째 지혜다.

자기기만을 통한 사기꾼 경계

이 구절은 매우 역설적이다. 대인관계에서 사기꾼을 경계하는 일반적 방법은 주의를 기울이며 상대를 꿰뚫어 보려고 하는 것이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정반대의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기만에 눈을 감으려 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파악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추악함과 절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태도인 것이다.


인간의 기만적 면모에 깊이 몰두하면, 삶의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원적 불신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근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기만당하는 것이다.


타인의 기만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일정 부분 '기만'을 허용한다. 이는 상대의 모든 거짓말이나 기만적 의도를 파헤치려 하지 않고 일종의 '전략적 무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꿰뚫으려다 지치고 냉소적이 되는 대신, 자신의 내면의 확고함의 유지를 위해 스스로를 보호막으로 감싸는 역설적 지혜이다. 인간 악의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길에 집중하려는 태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누가 허영심 강한 자들이 가진 겸손의 깊이를 제대로 잴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겸손 때문에 그들을 좋아하고 동정한다. 허영심 강한 자는 그대들로부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배우려 한다. 그는 그대들의 눈길을 먹고 살며 그대들의 두 손으로부터 게걸스럽게 칭찬을 먹어 치운다. 그대들이 거짓말로 그를 칭찬하면 그는 그대들의 거짓말조차 믿는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무엇인가?'라고 탄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 참된 덕이듯 허영심 강한 자는 자신의 겸손을 알지 못한다!

허영심 강한 자들에 대한 연민

니체는 허영심 강한 자들이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그 겸손이 사실 자신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과 칭찬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그들은 타인의 '눈길'과 '칭찬'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살아간다. 심지어 그 칭찬이 '거짓말'이더라도 그것을 믿으려 한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할 가치를 찾지 못해 외적인 인정에 집착하는 나약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탄식을 내뱉으며, 그들 내면에는 존재론적인 불안감과 자신에 대한 깊은 의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이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자신을 모르는 것이 참된 덕이듯 허영심 강한 자는 자신의 겸손을 알지 못한다!', 이는 사실 반어적 표현이다. 니체는 기존의 '겸손'이 때로는 자신을 속이는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동기(허영심)를 알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겸손'이 진정한 덕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자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들 내면의 불안과 나약함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 이는 단순한 경멸이라기보단, 그들의 본질적 결핍을 이해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대인 관계에서 나의 세 번째 지혜는 이렇다. 그대들이 겁에 질린다고 해서 내가 악인들을 싫은 눈길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대들 중 최고의 현자들도 내게는 그다지 현명하게 보이지 않듯이 인간의 악의도 실제로는 소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진실로 말하노니, 악에도 아직은 미래가 있다! 그리고 가장 뜨거운 남국은 인간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악인에 대한 비판적 시선과 악의 미래

이 구절은 '악'에 대한 니체의 독특한 관점을 드러낸다. 차라투스트라는 '악인'이라고 규정하고 두려워하는 존재들을 일방적으로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일반적 도덕 잣대에서 벗어나 더 심오한 시선으로 '악'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다.


인간의 '악의'는 대중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이거나 거대하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대중의 두려움이나 과장이 '악의'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들 뿐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니체의 관찰을 보여준다. '악' 또한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이며, 그것이 가진 잠재력이나 동기를 단순히 도덕적 잣대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는 기존의 도덕적 '악'으로 규정된 것들 속에서도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력, '미래'를 본다. '가장 뜨거운 남국'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능, 가장 강렬한 욕망, 혹은 아직 탐험되지 않은 인간 정신의 영역을 상징한다. 니체는 기존 도덕이 억압하고 '악'으로 규정했던 것들 속에서 새로운 가치 창조의 가능성, '권력에의 의지'의 순수한 발현을 보고자 한다. 이는 '선악의 피안'을 넘어서려는 그의 철학적 시도의 핵심이기도 하다.


"아, 나는 최고이며 최선인 자들이 지겹다. 그들의 높이에서 나는 저 위, 저 밖, 저쪽으로 벗어나 초인에 이르기를 열망했다!""그리고 나 자신도 변장한 채 그대들 사이에 앉아 있고 싶다. 내가 그대들과 나를 구분하지 못하도록. 이것이 인간을 대하는 나의 마지막 지혜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 허물기

'최고이며 최선인 자들'은 기존의 도덕적 기준이나 사회적 성공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니체는 그들의 '높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마저도 넘어서서 '초인'에 이르기를 열망한다. 기존의 모든 가치와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앞에서 그는 인간의 나약함과 위선을 비판하고, 자신을 '그들'과 구분 지었다. 그러나 마지막 지혜는 궁극적인 자기 극복과 초월을 통해 '그들'(나약한 인간들)과의 경계마저 허물고,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초인'의 경지에 이르러 더 이상 그들을 비판하거나 경멸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신과 타인의 본질적 구분을 넘어선, 삶 전체를 긍정하고 모든 존재를 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혜와 사랑의 상태를 암시한다.


혹은 역설적으로, 그가 너무 압도적인 존재가 되어 자신의 위대함을 '변장'하고 그들 사이에 앉아 그들의 나약함 마저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경지를 의미할 수 있다. 타인을 비판하거나 구분 짓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는 초월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니체의 '지혜로운 대인관계'는 일반적인 윤리나 도덕적 규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나약함과 악의, 허영심 등 추악한 면모를 직시하되, 그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나약함을 연민하며, 궁극적으로는 '악'을 포함한 모든 삶의 측면을 긍정하여 초인으로 나아가려는 역설적이고 심오한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대인관계를 통해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가치 창조를 실현하려는 니체 철학의 핵심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대는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앞으로 더 무르익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소리 없이 말하는 자는 다시 한번 웃고는 사라졌다. 그러자 나의 주위는 이중의 고요에 둘러싸인 것처럼 적막해졌다.
그대들은 내게서 이 말도 들었다. 누가 모든 인간들 중에서 변함없이 이 가장 과묵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가!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의 과일은 익었으나 그대는 그대의 과일에 어울릴 만큼 익지 못했구나!”

마지막 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대중에게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지만, 그들이 아직 자신의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혹은 자신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혹은 그들이 맹목적으로 자신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 다시 고독으로 돌아가야 함을 느끼는 대목이다.


가장 과묵한 것, 이 표현도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심오한 진리는 말로 쉽게 전달되거나 대중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고, 듣는 자가 스스로 고독 속에서 심사숙고해야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 발언은 대중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 중 한 명이 한 말로, 차라투스트라의 사상(과일)은 이미 완성되고 무르익었다. 그러나 정작 차라투스트라 자신은 그 위대한 사상에 완전히 합치될 만큼, 즉 '아이'의 경지에 완전히 도달할 만큼 충분히 '익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이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고뇌, 즉 위버멘쉬를 설파하는 자 자신도 완벽한 위버멘쉬가 되기 어렵다는 인간적인 한계를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비판은 차라투스트라로 하여금 다시 고독 속으로 돌아가 더욱 자신을 단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2부는 1부에서 '신은 죽었다'는 충격적인 선언과 '초인'의 도래를 예고한 차라투스트라가 세상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기존 가치의 병폐를 폭로하고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한 사상적 토대를 다지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1부가 선언적이라면, 2부는 그 선언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2부에서는 니체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진다. 이원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사고, 나약함과 원한, 기존 제도 및 관습에 대한 비판. 그리고 비판적 해체를 넘어 니체 철학의 핵심 동력인 '권력에의 의지'와 '자기 극복' 개념을 더욱 강화시켰다.


니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자들에게 안락함과 쉬운 답을 주기보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고 스스로 생각하며 고독하게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용기를 요구한다. 비판에 그치지 않고 이 허무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구제'의 가능성과 '의지'의 불멸성을 말하며 다가올 3, 4부의 초인 사상에 대한 강력한 예비 단계가 된다.


그 과정 속에서도 본인을 너무 믿을 독자들을 경계하는 모습에선, 너무 니체다워 웃기기도 했다. 니체의 모든 사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주입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니체가 근본적으로 가장 경계하던 것은 '가치의 일원화, 획일화, 주입'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지지하는 사랑과 희생을 폄하하는 철학자에 대한 반감을 품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존주의 입장에선 자신이 입법한 가치라면, 실존적 책임을 질 수만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2부는 '모든 것을 의심하되, 그 의심조차 넘어서는 창조적 고독'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당신에게 초인으로 가는 고독은 어떤 형상인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