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가소성, 부조리가 얽힌 현대인의 실존 노정
니체가 제시한 '초인'의 개념은 분명 우리에게 강한 영감을 주지만, 동시에 현대인의 삶에 적용하기에는 상당한 난관이 따른다. 만약, 지금 이 순간부터의 내가 취하는 모든 가치를 나의 몸과 미감에 따라 정하며 산다고 가정해 보자. 내 과거 행위에 대해 그 행위 자체와 표상을 분리하여 스스로를 입법가로 만들어 실존적 책임을 지겠다고 해보자. 그렇지만 지난 모든 고통과 상처마저 긍정하며 "다시 반복해도 좋다"라고 외치는 강인한 인간상이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 영역인지 회의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니체 스스로도 '의지의 가장 큰 슬픔은 과거를 의욕할 수 없는 데에 있다'라고 인정했듯(그러므로 복수심을 극복하라 하였다), 과거를 재창조하려는 초인의 의지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와 마주한다.
카뮈는 니체의 긍정적 의지에도 회의적 시각을 가졌던 철학자이다. 그는 세계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인간이 아무리 의미를 창조하려 해도 결국 부조리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객관적이고 최종적 의미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처럼 삶의 모든 것을 의욕적으로 긍정하고 가치를 창조하려 하는 것은 사실상 허상에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부조리를 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을 지속하는 반항의 태도였다. 이 반항을 통해 주관적이고 일시적인 의미를 끝없이 갱신하는 삶을 옹호했다.
반면, 사르트르나 보부아르는 니체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라고 말하며 신과 같은 절대적 존재가 부재한 세상에서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고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자유를 논하며 사회적 억압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아갈 것을 역설했다. '타자의 시선'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관계적 자유를 확장한 것이다. 이들은 니체처럼 과거를 초월하는 방식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을 통해 자신을 구축해 나가는 데 집중했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관계와 환경 속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관점은, 무수한 의미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실천적인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적절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무의식까지도, 정말 의지로써 컨트롤이 가능할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기존의 가치 제도를 정말 '의지적으로' 부술 수 있는 것일까?
니체의 초인이 '낡은 가치 제도'를 부수는 데에 주력한다면, 프로이트와 라캉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내면에 힘에 더 주목했다.
이러한 무의식의 영역을 파헤친 대표적 인물이 바로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구분했다. 이때 '초자아'는 부모, 사회, 문화 등 외부로부터 습득된 도덕적 규범과 이상을 내면화한 것으로 우리의 행동과 사고에 무의식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 할 때, 내면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가 초자아일 수 있는 것이다. 초자아는 내면의 도덕 경찰이다. 이드(id)의 충동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실존적 죄책감을 발생시킨다. 어쩌면 초인을 꿈꿔도 초자아의 무의식적 검열이 발동해 "네가 뭔데?"라고 물을 수 있다.
이러한 초자아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자유 의지만으로 자신만의 가치를 정립한다는 것은,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초자아는 우리의 의식적 노력만으로는 쉽게 부술 수 없는, 무의식 깊이 자리 잡은 체계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의식이 단순한 본능적 충동의 저장소가 아닌, 언어와 상징체계에 의해 구성되며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무의식은 개인 내부가 아닌 '대타자'(언어와 규범)의 장인 것이다. 실재는 상징계로 번역되지 않는 잔여로서, 초인적 서사에 늘 어긋남을 남긴다. 라캉은 욕망이 자율적 선택이라고도 보지 않았다. 타자가 욕망하길 바라는 대로 욕망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니, 초인적 자기-입법은 결국 타자의 상징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완전한 자율에 한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도, 자기 자신의 가치를 선택하라 하였을 때, 인간 문명에서 발견되지 않은 정말 새로운(new) 가치를 꼽을 사람이 있을까? 라캉에게 우리의 '자유 의지'는 이러한 무의식적 구조에 의해 이미 상당 부분 제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 신경과학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이미 뇌에서 활동이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자유 의지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뇌의 뉴런과 시냅스가 형성하는 복잡한 연결망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새,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의식적으로 '컨트롤한다'라고 느끼는 것조차도 생물학적이고 무의식적인 과정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뇌의 가소성은 희망적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뇌는 경험과 학습에 따라 구조와 기능이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지행동치료(CBT)와 같은 접근 방식은 이러한 뇌의 가소성을 활용하여 비합리적 사고방식이나 자동적인 부정적 사고를 변화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사고 회로를 전환하는 것이 무의식 전체를 완전히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지만 반복적 훈련을 통해 부정적 감정이나 행동 반응을 유발하는 인지 패턴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사고회로를 전환하는 것이 '초인'이 되는 것과 같을까? 만약 니체가 말한 '모든 고통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초인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인지행동치료는 개인이 고통과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사실 원초적 공포, 애착 회로(편도체, 해마 등)는 깊게 각인되어 완전 삭제는 불가하다. 그러니, 회로 조정이 완전 통제라는 명제도 불가능하다. 무의식적 방아쇠를 덜 무의식적으로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초인'은 뇌 가소성의 최종 단계라기 보단, 끊임없는 재훈련의 방향성에 더 가깝다. 고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궁극적인 경지, 즉 과거의 모든 과오와 상처, 고통을 완전하게 의욕하고 긍정하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에게 매우 도전적 과제일 것이다.
니체가 사실 '초인이 실존한다'라고 명확하게 말한 적은 없다. 오히려 초인은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이념이자 목표에 가깝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기존의 낡은 가치와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자신을 극복해 나가는 존재가 되기를 염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사상은 우리에게 끝없는 자기 극복과 성장을 요구하는 가혹한 철학으로 느껴질 수 있다.
초인이 사실,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무엇인가를 믿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그의 초인 사상 역시 어쩌면 인간의 의지를 새로운 '신'으로 삼아 숭배하는 것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결국 초인 역시 특정한 가치(의지, 자기 극복 등)를 굳건히 믿고 나아가는 존재이며, 이는 마치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직접 만들어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니체는 언젠가 이러한 '의지' 조차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철학이 끊임없는 자기 변혁과 초월을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책을 다 읽고 나면 태우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즉, 니체의 사상 자체가 최종적 답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의 촉매제가 되기를 바랐던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니체의 초인 개념은 현대인에게 영감을 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본질적 한계와 무의식의 영역 앞에서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카뮈가 부조리를 직시하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자유와 책임을 강조했듯,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무의식적 요인에 의해 제약될 수 있음을 인정하되, 동시에 뇌의 가소성을 활용하여 긍정적 사고로 나아가려는 노력은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이 모든 사유의 끝에서, 우리는 정말 지옥 같은 현실을 천국처럼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는 강인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카뮈의 말처럼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부조리 속에서도 굳건히 삶을 지속하는 것이 최선일까?
니체의 초인 개념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인간 존재를 넘어서는 이상이지만, 그것은 곧 인간이 끊임없이 극복해야 할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으로 남는다. 그러나 무의식의 작동, 사회적 상징계, 생물학적 조건들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기-입법자로 설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프로이트와 라캉이 지적했듯, 인간은 결코 완전한 자율성을 갖지 않으며, 신경과학의 발견들 또한 우리의 선택이 자유롭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초인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실현 가능한 상태라기보다, 자기 성찰과 가치 재구성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이상에 가깝다. 인지행동치료나 뇌 가소성처럼 현실적 개입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결국 초인은 단일한 정체성이나 결론이 아니라, 부조리와 제약 속에서 자기 삶을 긍정하려는 노력의 상징으로 남는다. 그것은 이상화된 존재라기보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 그 자체이며, 현대인의 실존적 고민을 자극하는 하나의 사유 도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