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 아프다.
이야기할 때마다 다시 돌아온 건 냉소적인 반응뿐이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와 같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던 말들.
그 후에는 내가 힘들어야 하는 이유를 찾아본다.
1번 집이 없나요?
2번 밥을 굶었나요?
3번 몸이 아픈가요?
4번 친구가 없나요?
전부 다 아니라면 당신은 힘든 게 아닙니다 탕탕. 무언가 나를 괴롭게 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때부터 마음이 조각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스스로 마음을 부정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의 불안한 감정의 이유를 찾으려고 했고, 이유를 찾지 못한 마음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이곳저곳에 박혀 아주 작게 반짝였다.
나는 청소년기를 한집에서 쭉 보내왔는데, 이사를 가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 집의 형편이 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았다는 것이기도 했다. 어렸을 적부터 항상 여동생과 같이 방을 써왔던 나는 언제나 나의 방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나만의 공간, 나만의 것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나에게 소중했던 것은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작은 종이학들이 가득 담긴 병,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주고받은 편지들, 내가 쓰고 그린 일기장들. 그것들은 그때의 나 자체와도 같아서 아주 작은 상자에 차곡차곡 쌓아져 갔다. 그저 그런 것들이 전부였다. 꾸역꾸역 혼자 견뎌냈던 시간들. 언젠가부터 그 상자를 열 일이 없어졌는데, 그건 내가 나를 돌보고 있지 않음과 같았다. 더 이상 나의 마음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게 된 것이다.
타인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가 해소되지 못하고 지속되니 어느 순간부터 표현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는데 심지어 어쩔 때에는 감정이 전부 메말라버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상상 속에서는 누구보다 잔인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해소되었다면 커지지 않았을 감정들도 상상 속에서는 몸집이 점점 불어나 아주 지독한 괴물 같은 모습을 띄었다. 그러다 얼마 전 새로운 곳으로의 이사로, 오랜만에 그 상자를 열어보게 되었는데 막상 열어보니 그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지극히 정상적인 청소년기 또래 아이들의 문장들이었다. 막상 마주 보면 무섭지 않을 불안들을 나 스스로가 괴물의 모습으로 키워갔던 것이다.
때로는 그런 생각도 하고는 했는데, 누군가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굳이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것들. 그냥 이유 없이 괴로움이 밀려오는 날도 있으니까. 그저 불안함 감정을 알아채고, 그렇지만 또 그 하루를 견뎌내고 버텨낸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는 누군가가 어딘가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로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면 어떨까 하는 것도.
그래서 다시 감정을 말하는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그 또한 나에게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떠한 단어를 선택해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는 일단 스스로 그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무언가로 형상화시켜 내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못나고 뾰족한 모습을 인정해야 하는 것. 당연하게 부정적인 감정으로 수렴되는 이유로 열어보지 않았던 나의 작고 소중한 상자를 열어보는 것. 일단 그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