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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녜은 Dec 25. 2018

한번도 결혼하지 않았던 클림트의 사랑

미리보는 나만의 아트투어 - 첫번째 가이드  



미술사전공생이지만 잠시 미술계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미술을, 전시를 사랑한다.  전시를 보러 해외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올해 4월 도쿄, 오스트리아와 일본의 외교 수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들이 준비되고 있다. 조금만 알고가도 다르게 보이는게 전시다. 나만의 비밀스러운 가이드를 시작한다.


구스타프 클림프 서거 100주년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마담 도라가 찍은 클림트의 초상사진, 1908.

클림트(1862~1918)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상징주의 화가이다. 그를 떠올리면, 황금빛과 에로틱한 여성상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과도하게 섹슈얼하고 에로틱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 평생토록 대중과 미술계, 평론가로부터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받은 인물이다. 클림트는 평생 여성들 속에서 살았고 주로 여성들을 그렸다. 일찍 아버지와 유일한 남동생(에른스트)를 잃고 평생 어머니와 누이들과 한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단 한점의 자화상을 남기지 않은 화가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는 평생 결혼 한 번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갔다. 물론, 여성과의 교제가 일절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당대 사교계에서 꽤나 인기 있었던 인물이라고 한다. 많은 귀부인, 모델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녀에게 특별한 여성이 2명 존재한다.


클림트의 여자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와 에밀리 플뢰게


(왼쪽부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와 에밀리 플뢰게

에밀리 플뢰게

클림트의 남동생 에른스트의 아내 헬레네 플뢰게의 여동생이다. 에른스트가 갑자기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클림트가 어린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클림트가 임종 직전 찾은 인물이 플뢰게라고 하는데, 둘의 관계를 증명할 만한 편지, 사진, 그 어떠한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유한 유태인 금융업자의 딸이다. 상류층의 여성이었고 클림트를 위해 매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른나이에 부유한 설탕 제조업자이자 금융업자인 페르디난트 블로흐와 결혼을 했다. 블로흐 부부는 클림트와 컬렉터와 화가로서 인연을 맺어 다수의 그림을 사들였다. 클림트와 아델레는 그녀의 초상화 주문 이후로 급속히 가까워졌고 밀회를 즐겼을 것으로 예상된다.


클림프 서거 100주년 기념전이 아닐까

Gustav Klimt: Vienna- Japan 1900
전시일정  2019.04.23-07.10
전시장소  도쿄도미술관 (우에노공원 안)
<구스타프 클림트 - 비엔나와 일본 1900 > 전시 팜플렛, 포스터

2018년은 클림트 서거 100주년의 해이다. 나는 이를 기념하며 선보이는 일본 최대규모의 클림트 전시라고 생각된다. 비엔나와 일본이 1900년대부터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던 큰 흐름이 주가 되겠지만. 그의 초기 자연주의적 작품과 더불어 그의 황금시대(Golden Phase)작품들이 포함된다. 황금시대의 대표작 <유디트1>과 비엔나 제체시온의 벽화를 장식한 <베토벤프리즈>의 복제품이 본 전시를 더욱 더 빛내줄 예정이다.


아는만큼 보이는 비밀스러운 가이드



가이드 하나

클림트의 황금시대(Golden Phase)


그를 떠올리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골드. 그는 반짝이는 금색을 탁월하게 잘 사용했다. 이 시기 그는 에로틱한 여성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장식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과  황금색으로 가득찬 배경이 항상 함께한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황금시대’ 라고 일컫는다. 그는 10년간의 황금시대 절정기를 보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여지는 <유디트1>는 황금시대의 초기 작품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1>, 1901, 벨베데레 궁 오스트리아 회화관.

유디트는 르네상스부터 20세기 초 클림트에 이르기까지 역사상의 많은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소재 중 하나이다. 대담한 살인을 한 성경적 인물이며 아름다운 여성으로 인기가 좋은 인물이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홀로페네스의 목을 베어버리는 행위 또는 그를 향한 유디트의 혐오감을 표현했다. 하지만 클림트는 굉장히 관능적인 포즈와 표정의 유디트를 표현하였다. 그녀를 팜므파탈적 모습으로 탁월하게 그려냈다. 유디트를 아주 에로틱하게 가슴을 풀어헤치고 얇은 옷을 입혀 놓았다. 죽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제스쳐를 보여 더 파격적이다. 남자를 유혹하는 여성의 성적 매력에 주목한 것이다. 그 모델로 '아델레 블로흐'를 선택했다.클림트는 아델레의 얼굴을 토대로 유디트를 그리면서도 완전히 닮게 그리지는 않고 주제에 맞게 드라마틱하게 변형했다.


황금색을 즐겨 사용했던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째로 이탈리아 여행때 마주했던 비잔틴예술에 감동을 받았던 일과 둘째로 금박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본미술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19세기는 당시 일본풍 즉, 자포니즘에 예술가들이 열광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가이드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의 제 9교향곡을 회화적으로, 시각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해당 작품은 벽화로 비엔나 '제체시온(Secession) 건물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총 길이는 34m이며 세 개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가 40세 무렵에 완성한 대작이다.

(왼쪽부터) 비엔나 제체시온 건물, 제체시온 건물 지하에 위치한 <베토벤프리즈>

본 전시에는 1984년에 제작된 실제 크기의 복제품이 선보여진다. 해당 작품들은 벨베데레 궁 오스트리아 회화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작품은 '황금시대'의 절정기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그니처 1)신화적인 요소와 모티프 사용 2)장식적인 강조 3)황금색과 에로틱한 여성상 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적대하는 벽>, 베토벤 프리즈 정면의 벽, 1902년.
<약한 자들의 고뇌>, 베토벤 프리즈 오른쪽 벽화, 1902년. 천사들의 합창과 남녀의 키스로 마무리된 작품.

가이드

제체시온 Secession


분리파(Secession)는 '제체시온'이라고 발음한다. 이는 분리된 서민 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특정 귀족계급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서민계급들은 도시 외곽에 새로운 집단을 형성했다. 이와 같은 저항은 바로 '분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제도권에서 벗어나고자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19세기 말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독일의 뮌헨, 베를린,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빈 분리파가 대표적이다.


빈 분리파 (Vienna Secession)(1897)

19세기 말 빈(Wien)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전기, 철도 자동차 등 현대사회로의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가의 프란츠 요제프는 1848년에 왕위를 계승했고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보수주의를 이어갔다. 사회, 문화전반에 보수성향이 가득했다.

링 스트라세(Ringstrasse)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세프에 의해 조성되었다. 사진출처 Getty Images

빈의 젊은 예술가들은 이에 저항하며 1897년에 구스타프 클림프를 주도로 '오스트리아 미술가 연합(the Association of Visual Artists Vienna Secession)'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 조직은 화가이자 장식예술가인 콜로만 모저,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 건축가 마리아 올브리히를 포함한 19명의 젊은 미술가들로 구성되었다.

1902년 제 14회 분리파 전시회때 찍은 빈 분리파 멤버들.  Photography by Moriz Naehr, 1902.  사진 출처 Getty Images

이들은 전통이 강하고 폐쇄적인 교육 체계의 아카데미 방식에 반항했고 좀 더 자유롭고 종합적인 예술을 시도하였다. 회화, 조각, 건축, 음악 등의 장르의 경계를 없애고 총체적인 예술을 탄생시키고자 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분리파를 거부하기보다는 새롭게 받아들였다. 전시회를 열어 그 수익으로 '분리파 건물'을 세우게 된다. 그 건물 안에서 총체적 예술을 만들며 자신들의 뜻을 마음껏 펼쳤다. 빈 분리파 활동 중 작품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던 클림트의 '베토벤프리즈'가 대표적이다.

(왼쪽) 마리아 올브리히가 설계한 분리파 건물 정면 스케치 (오른쪽) 제체시온 건물 파사드에 적힌 글귀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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