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특별하단다'를 읽고
웸믹이라는 ‘작은 나무 사람들’은 금빛 별표가 든 상자와 잿빛 점표가 든 상자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재주가 뛰어나거나 나뭇결이 매끄러운 웸믹에게는 별표를, 그렇지 못한 웸믹에게는 점표를 붙인다. 그래서 재능 있고 아름다운 웸믹은 별표로 번쩍거렸지만 그렇지 못한 웸믹은 잿빛 점표처럼 눈에 띄질 않았다.
주인공인 펀치넬로는 점표를 많이 받는 웸믹이다. 웸믹들은 펀치넬로의 점표를 보고 그와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은 점표가 많이 붙은 웸믹들 뿐이었고 펀치넬로는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펀치넬로는 루시아라는 웸믹을 만난다. 그녀는 몸에 별표도 점표도 없는 깨끗한 나무였다. 지나가는 웸믹들은 신기하다면서 별표를, 다른 웸믹들은 이상하다며 점표를 붙이려 했지만 신기하게도 루시아의 몸엔 그 어떤 표식도 붙지 않았다. 펀치넬로는 부러운 마음에 어떻게 몸에 별표나 점표가 붙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루시아는 목수 엘리 아저씨에 대해 말해주었다. 펀치넬로는 “점표로 가득한 나를 그가 만나줄까?” 하며 의기소침했지만 용기를 내서 찾아갔다.
뜻밖에도 펀치넬로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엘리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그는 다름 아닌 자신을 만든 목수였다. 펀치넬로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엘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째서 루시아의 몸에는 표가 붙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엘리 아저씨는 말했다. “루시아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지. 그 표는 네가 붙어있게 하기 때문에 붙는 거란다.” 그 말을 들은 펀치넬로는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몸에서는 점표 하나가 땅으로 떨어졌다.
웸믹들
이야기 속 웸믹들이 서로에게 붙여주는 별표와 점표는 오늘날 사람들이 sns 상에서 주고받는 ‘좋아요’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를 많이 받을수록 자신의 가치가 증명된다고 느낀다. 그러나 ‘좋아요’가 타인으로부터 부여되는 가치인 한에서 그곳에서 증명되는 나는 나의 진실을 소외한 대가이다. 수많은 ‘좋아요’에도 느껴지는 공허함은 그것을 나의 진실로 오해한 결과다.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사실’이 아닌 ‘진실’이다. 이야기 속 별표와 점표처럼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지식이 ‘사실’이라면 ‘진실’은 오직 나로서만 인정될 수 있는 지식이다. 그리고 그 지식의 장소가 무의식이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세상 속에 나로 태어나기 위해 포기하고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흔적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는 ‘나라고 할 수 없는 나’로서 따라서 웸믹들의 별표와 점표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분열된 현실을 덮어버리기 위한 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루시아
한편 웸믹들의 끝 없는 집착은 그곳이 어떤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별표와 점표가 붙지 않는 루시아의 몸은 그에 대한 증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고 할 수 없는 나’ 즉 외면하고 싶은 분열의 현실도 뒤집어 생각하면 지금의 나보다 나로서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식화될 수 없는 분열(억압)의 현실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그 문을 여는 것도 닫는 것도 나(주체)에게 달려있다.
엘리 아저씨
정신분석은 언어를 통해 그것을 시도한다. 분석가는 언어를 다룸으로써 내담자의 분열의 현실(무의식)을 재생한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분석가는 내담자에게 눈이 아닌 귀로서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눈은 내담자를 외부의 대상으로 배치하여 정상과 비정상성을 놓고 판단한다. 따라서 눈은 그의 진실에 눈을 감는다. 반면 귀는 내담자의 말과 연결되어 그의 외부가 아닌 내면에 자리 잡는다. 즉 분석가는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 내담자가 주인공이 되어 분열된 자신의 현실을 재생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한다.
그림책 속 엘리 아저씨는 펀치넬로의 말을 들어주는 유일한 수신자이다. 그는 펀치넬로의 몸에 붙어있는 점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펀치넬로는 엘리아저씨를 통해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반면 웸믹들은 오직 별표와 점표의 개수를 헤아리며 눈으로만 대화한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누가 더 훌륭하고 멋진 웸믹인가 이다. 그들은 그들 내부로부터 차단당한다.
요구/욕망
그렇다면 분석이라는 무대 위에서 분명해지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이다. 분석가와의 관계 속에서 재생되는 분열의 현실, 그것은 주체가 꼼짝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반복되는 불가능성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재생 속에서 명확해지는 건 자신이 무엇에 집착(불가능한 요구)하고 있었는지가 아닐까? 아마도 분석 경험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업데이트하는 게 아닌 자신의 일부를 어느 순간 스스로 내려놓는 경험일 것이다. 그런데 그 비워짐을 통해 나의 분열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 불가능한 요구에서 욕망으로 전환, 그것은 하나의 도약이다.
정신분석은 요구와 욕망을 구분한다. 요구는 기억에 뿌리를 두어 과거와 연결되지만 욕망은 분열의 현실로부터 탄생한 바람이기에 미래와 연결된다. 그래서 요구는 전보다 더 명확함에 대한 요구일 수밖에 없는 반면 욕망은 불가능성에서 비결정성으로 도약을 의미한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끊임없는 집착 속에서 명확해지는 건 자신이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가리키는 표상이다. 그러나 비움을 통해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나로서 특별해질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순간 펀치넬로의 몸에서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그 점표’, 그것은 그가 특별해지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렇다면 웸믹들의 별표와 점표로 구분되는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과의 차이 속에서만 정초 될 수 있는 나이며, 보편적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된 나일뿐이다. 그들은 대단해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특별해질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