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블랑과 페이크

- 영화 '완벽한 타인'을 통해 본 주체의 위기-

by 이재창


우리가 객관적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는 주체의 진실을 억압한 결과다. 현실은 시니피앙, 이미지 그리고 대상의 형식으로 진실을 포장한 하나의 허구다. 라캉 정신분석은 이를 가리켜 쌍블랑(semblant_외연)이라고 하는데 주체성과 연동되는 허구라는 점에서 페이크와 구분한다.


“쌍블랑이 벗겨질 때 정신분석 문헌에서는 누드가 된다는 표현을 쓴다. 의미나 이미지를 부여하지 못하는 맨살 그것을 마주하면 트라우마적 체험이 된다. 그것을 싸주는 제도나 이미지를 쌍블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쌍블랑의 중심에는 진리를 보증하는 타자, 상징적 아버지의 몫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진리가 될 순 없다. 그것은 단지 함께 동일한 것을 바라보면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무엇이다.”

“페이크라는 단어는 진실과 쌍블랑이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나오는 단어다. 가면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는데 가면을 벗기면 아무것도 없는데 가면이라는 게 드러나면 가면일 뿐인 것으로 되는 것이다. 페이크 뒤에 감춰진 대상은 의미가 아닌 타자의 의도다.”

[2022 위기 사회와 정체성 - 이수련]


영화 완벽한 타인은 쌍블랑과 페이크의 분명한 예시를 보여준다. 영화 전체가 의심과 의도로 점철된 페이크 적 현실의 단면이라면 수수께끼처럼 불쑥 등장하는 월식은 쌍블랑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중심에 달과 스마트폰을 교차시킴으로서 쌍블랑과 페이크를 결정짓는 대상에 대한 구조적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두 대상을 다양한 수준에서 대조해 봄으로써 쌍블랑이 페이크로, 페이크가 쌍블랑으로 뒤집히는 근본적 원인을 추적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정신분석이 말하는 진실의 위상과 주체의 위기에 대한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은 새로운 차원에서 연결과 소통을 가능케 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차원의 연결, 그 중심엔 대상도 주체도 결정되지 않음으로써 거울처럼 반영된 연결의 무한성이 있다. 따라서 연결이 대상과의 투명한 관계를 실현하는 작업이라면 ‘무한히’ 연결을 수행하는 스마트폰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가장 불투명한 것, 가장 낯선 것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스마트폰이 없는 세상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생활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자 나아가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의 이면과도 밀접(은밀)하게 연동됨으로써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스마트폰은 ‘가장 내밀한 장소에서 가장 낯선 것‘¹ 을 매개하고 있다. 이는 주체의 환상이 구성되는 장소와 구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환상과 동기화된 사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마트폰을 매개로 구성되는 현실은 주체의 환상이 구성되는 형식을 공유한다. 정신분석에서 환상은 불투명한 타자의 욕망을 중심으로 구성된 주체의 내밀한 현실로, 중심엔 주체의 분열을 전제로 얇은 스크린이 구성되고, 그 위로 충동의 만족이 다양한 옷을 입고 투사될 때 비로소 구성된다. 따라서 스크린이 내부를 향할 때는 주체의 고유한 주이상스(충동의 만족)를 실현하는 무대가 되어주지만, 조금이라도 각도가 틀어지면 스크린 너머로 타자(시선)의 불투명한 욕망이 고개를 내밀어 주체의 만족을 불안으로 전복시킨다. 이는 환상의 플롯이 내재하고 있는 구조적 운명이다.


따라서 환상의 스크린이 흔들리는 순간 세상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식탁 위로 뒤집어진 휴대폰의 벨소리는 흔들리는 환상의 스크린을 대변한다. 다시말해 스마트폰의 벨소리가 거듭될 수록 불투명해져가는 서로의 관계는 스마트 폰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도 그것을 통해 직접적으로 매개된 불투명한 타자의 욕망 때문이다. 영화는 무고한 친구들도 의심의 대상이 되는 모습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 시켜준다. 이밖에도 스마트폰을 통해 폭로되는 대부분의 내용이 성적 판타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과 게임이 진행될 수록 낯설어지는 서로의 존재는 현실로 뒤집어진 환상의 수준(쾌락의 고유성)을 방증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 서로는 의도를 품고 있는 불투명한 존재로서 마주할 수 밖에 없으며 불길한 사건에 대한 예고와 유예로서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반면에 영화 속 달은 등장인물의 외부에 자리한다. 이는 단순한 외부가 아닌 영화 속 저편으로서 등장인물들과 근본적인 수준에서 비대칭적 관계를 맺는다. 그로인해 달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상징한다.


하지만 달이 특별한 대상일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 이유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수행(기능)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반복되는 등장과 사라짐으로, 달은 도달할 수 없는 장소에서 말없이 자기 부재의 법칙을 수행함으로서 끝없이 펼쳐진 하늘 저편 어딘가의 타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달을 경유하여 구성되는 현실의 중심엔 상징적 타자의 몫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몫이 상징적 차원을 전제로 구성되는 이상 현실은 허구를 감싸고 있는 외연일 뿐이다. 하지만 달(상징적 타자)을 매개로 구성된 그 허구로서의 공간이 타인과 공명할 수 있는 믿음의 장이 되어주고 타자와 공명함으로서 구성된 의미는 세계를 물질 이상의 무엇으로 만들어 준다.² 앞서 페이크의 현실이 의심과 의도로 직조된 스크린 또는 가면이라면 쌍블랑의 현실은 상징(결핍)을 공유함으로서 믿음과 의미로 공명하는 몸이자 환경인 것이다. (바라봄으로서 강조)


영화는 달이 등장하는 2개의 장면을 통해 이러한 상징적 타자의 효과를 강조한다. 이는 유일하게 갈등에서 화해, 오해에서 이해로 전환되는 흐름을 담고 있으며, 서로의 (의도가 아닌) 의미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이순간 함께 달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달이 영화 전반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도 기능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이야기의 핵심적 소재인 그들의 유년시절은 ‘상실되었지만 빛나는 저편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달과 같다. 또한 추억을 중심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함께 월식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따라서 찰나와 같은 등장에도 영화 속 갈등의 국면을 화해로 전환 시킬 수 있었던 월식의 힘은 달을 중심으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적 타자의 효과(은유)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연결될수록 단절되고 단절될수록 연결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두 대상이 페이크와 쌍블랑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닌 그것을 통해 매개되는 타자와의 관계에 있다. 즉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위기는 스마트폰이 내밀성을 상실함으로서 전복된 타자와의 관계가 원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달이 수행하는 부재의 법칙에 균열이 발생한다면 그 또한 주체의 위기와 다름없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에게 월식은 흥미로운 이벤트에 불과하지만 과거엔 하늘에 뚫린 구멍과도 같은 불길한 사건이었다. 당시엔 그것을 신의 노여움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상징적 타자를 향한 부재의 법칙이 흔들림으로써 발생한 상상적 타자의 근접이라 할 수 있다. 이 순간 상상적 타자는 세상을 자신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상징적 세계의 부피감을 축소하는 절대적 타자이다. 즉 영화 속 뒤집어진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우리를 타인으로 만드는 명령과도 같다면, 과거의 월식은 꼼짝없이 우리를 모두(전체)로 환원시키는 명령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모순되어 교차하는 월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월식은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 궁핍해진 쌍블랑의 현실에 대한 해답이자 질문이다.



1. 맹정현, 『트라우마 이후의 삶』, 책담, 2015, p.62

2. 이정우, 『기술과 운명』, 한길사, 2012, p.48


참고문헌

맹정현, 「포터블 초자아」, 『디지털 테크놀로지 문화』, 한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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