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자폐를 가진 웬디에게 일상의 공백은 허락될 수 없는 수수께끼다. 오늘도 그녀는 반복되는 일상에 몸을 맡기며 불투명한 세상으로부터 벽을 쌓는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들려온 스타트랙 시나리오 공모전은 그녀의 굳건한 일상을 흔들어 놓는데. 평소 스타트랙 덕후로서 꾸준히 팬픽을 써왔던 그녀는 상금으로 시설을 벗어나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시나리오 공모전에 참가를 결심한다. 그러나 마감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패닉에 정신을 잃게 된 웬디는 그만 우체국 접수시간을 놓치게 되는데. 이제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방법은 직접 원고를 들고 600km가 넘는 LA파라마운트 픽쳐스로 가는 것. 혼자서는 횡단보도조차 건너지 못하는 그녀는 고민 끝에 일생일대의 모험을 선택한다.
자폐증자의 로드무비
영화 스탠바이 웬디는 벤 르윈 감독, 다코다 패닝 주연의 2018년 영화로 자폐를 앓는 주인공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흔히 발달 장애인의 성장드라마라고 하면 보호자와 함께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자폐증자의 로드무비라는 색 다른 장르로 고독하게 전진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엔 그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있다. 기존 영화들이 보호자를 매개로 장애인과 사회적 현실 사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배경으로 성장을 이야기했다면, 스탠바이 웬디는 그녀의 하나뿐인 가족인 오드리(언니)와의 갈등을 배경으로 그녀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사회에 적응해 나아가는 모습이 아닌, 자신의 삶을 재발견하는 모습을 통해 성장의 의미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따라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성장의 의미는 그녀의 사회적 현실이 아닌 심리적 현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그녀의 심리적 현실을 지탱하는 욕망을 경유함으로써 영화가 말하는 성장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의미 없는 행위만을 반복하며 외부세계로부터 고립을 자처하는 자폐증자의 내면은 일종의 사각지대이다. 과연 영화는 그녀의 욕망의 현실과 관객을 어떻게 접속시킬 수 있을까.
반복과 욕망
역설적이게도 영화는 그들의 방어기제인 반복을 통해 욕망의 현실에 접근한다. 반복에는 그것이 반복된다는 사실만으로 일종의 불가능성이 각인되어 있다. 그로 인해 주체의 입장에서 해석될 수 있는 두 가지 불가능성,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 또는 ‘반복하고자 하는 것‘이 반영된다. 이는 대상을 향한 주체의 수동적 입장과 능동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반복이라는 하나의 현상이 이 모순된 두 가지 입장을 매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반복은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의 명제 '억압되었기 때문에 욕망한다'를 관통하는 핵심지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복 속에서 주체의 수동성과 능동성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우선 영화 속에서 그녀가 수행하는 대부분의 루틴들은 자폐증자로서의 방어기제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에 조금이라도 균열(틈)이 발생한다면 그녀는 세상(타자)의 불투명성 앞에 패닉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궁여지책으로 구성된 반복으로 욕망의 길을 차단하며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수동적으로 고립시킨다.
하지만 그녀의 루틴들 중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는 반복이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요일별로 반복되는 7가지 색깔의 옷으로서, 이들은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7가지 차이(틈)를 만들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된 균열 앞에서의 수동적 태도와는 상반된 능동적 의지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7가지 색깔의 조합은 외부(타자)를 향한 웬디의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반복되는 7가지 색상 그리고 세상을 향한 그녀의 여정이 교차하는 곳에서 그녀의 욕망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녀가 성취한 성장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정신분석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를 자폐증자의 시선을 경유하여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의상을 통해 본 웬디의 포지션
요일별로 소개되는 고채도 색상의 옷은, 그녀의 무던한 일상과 대비되며, 반복되는 그녀의 일상에 특별한 차이를 만든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속에 반영 된 세상을 향한 그녀의 특별한 포지션을 확인할 수 있다.
일주일은 월요일을 시작으로 일요일로 끝이 난다. 여기엔 전체와 부분 모두를 관통하는 방향과 순서가 있다. 그러나 색상으로 구성된 웬디의 일주일은 그 자체로는 방향과 순서를 가늠할 수 없다. 대신 도트무늬(목)를 중심으로 빨간색 계열의 두 색상(일, 월)이 만드는 대칭성이 포착된다.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들에겐 비대칭적으로 반복되는 일주일이 그녀에겐 대칭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비대칭적 반복과 대칭적 반복 사이엔 어떤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우선 전자의 특성인 비대칭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일요일과 월요일 사이에 위치한 불연속성이다. 이곳은 끝과 시작을 구분 짓는 동시에 매개하는 지점으로, 그로 인해 월요일과 일요일 사이에 위치한 부분들(요일들)은 근본적으로 과거와 미래(시간)를 매개한다. 따라서 각 부분들의 의미는 주변과의 관계가 반영된 ‘순서’에 의해 결정된다. 반면 후자는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대칭적 구도로, 부분들의 의미는 내부(중심)로부터 결정된다. 이는 요일의 의미와 색상의 의미가 결정되는 위상을 비교해 봄으로서 확인 가능하다. 요일이 그 의미를 결정짓는 근거와 특성이 분리되어 있다면, 색상은 근거와 특성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비대칭적 반복을 통해 강조되는 것은 과거-현재-미래로서의 시간성이다. 반대로 대칭적 반복을 통해 강조되는 것은 동일한 ‘현재’로서의 공간성이다. 이러한 차이는 현실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신경증적 주체와 자폐증적 주체 간의 차이와도 일치한다. 즉 현실을 마주함에 있어서 보호막과 같은 독립적이면서 폐쇄적인 그녀의 태도가 시간 속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의상을 통해 본 웬디의 이행 과정
이처럼 웬디의 한주가 하나의 ’ 폐쇄적 보호막‘으로 비유될 수 있다면, 각각의 색상들은 보호막적 목적에 근거하여 해석될 수 있다. 우선 가장자리에 위치한 일요일과 월요일은 그녀의 내밀한 속살을 감싸는 껍질이자 동시에 불투명한 세상과 맞닿은 장소로서, 일종의 전선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요일과 겹쳐지는 오렌지와 레드는 외부세계에 대한 불안과 동시에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내적인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모험이 일요일과 월요일에 걸쳐 진행된다는 사실은 이러한 해석에 근거가 되어준다.
그렇다면 그녀의 내적 현실이라 할 수 있는 색상들 라벤더, 블루, 점박이, 옐로, 바이올렛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LA파라마운트 픽쳐스에 도착한 웬디, 그녀는 그토록 꿈꾸었던 시나리오 제출을 완수한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는 파란색과 노란색의 줄무늬 스웨터를 입고 등장한다. 참고로 두 색상(파란/노랑)은 상반된 보색으로 예전의 웬디에겐 중심에 자리한 점무늬(목요일)를 기준으로 양분된 색깔이었다. 둘은 웬디의 내면 속에서 유일하게 대칭을 이루지 못한 색상이자 보색으로서 이는 타협될 수 없었던 현실, 다시 말해 갈등의 중심을 상징한 것은 아닐까. 참고로 노랑과 파랑은 웬디가 자신의 시나리오에서 자신과 언니와 동일시하고 있는 스팍과 커크선장의 옷 색깔이다. 공교롭게도 영화는 이 장면에서 언니와의 오랜 갈등이 해결된 듯 한 웬디의 모습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신경증자의 포지션과 욕망의 윤리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반복 속엔 그것이 반복된다는 사실만으로 일종의 불가능성이 각인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간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공유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누구도 시간 앞에서 주인일 수 없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그러므로 불가능성을 중심으로 대상에 반영되는 것은 우열이 아닌 입장(포지션)이다. 이는 정신분석이 자폐증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신분석은 자폐의 근본적 원인을 정신적 발달의 지연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실재)과의 관계에 있어 주체가 선택한 포지션이다. 참고로 정신분석은 정상성을 규정하지 않으며, 평범하고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사람들 또한 신경증자로 분류된다. 우리는 앞서 웬디의 대칭적 반복과 신경증자의 비대칭적 반복이라는 두 주체의 입장을 확인하였고, 이를 통해 폐쇄적 보호막으로서의 자폐증자들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경증자의 비대칭적 반복은 무엇인가? 자폐증자가 외부 현실에 눈감은 존재라면 신경증자는 내부 현실에 눈감은 존재이다. 다시 말해 자폐증자의 대칭적 연속성이 외부로부터 폐쇄적인 보호막과 같았다면 신경증자의 비대칭적 반복은 내부로부터 망각(억압) 한 것을 외부로부터 추구하려는 욕망의 반영이다. 그들의 시간은 주체의 분열(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들의 시간 속에 ‘주기적’으로 자리한 불연속성이 바로 그 흔적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분열(억압)시킨 대가가 바로 정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눈감은 현실이 있다는 점에서 신경증자는 자폐증자와 다르지 않다. 즉 신경증자들에게 부여된 정상성은 진실의 등가물이 아닌 사실의 등가물, 즉 사회성에 불과하다. 여기서 영화가 자폐증자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성장의 윤리를 신경증자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사회성에 부합하는 성공은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발전의 한 양상이다. 하지만 성공의 결정권이 사회에 있다면 스스로를 성공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회적 성공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온 사람들이 말하는 우울과 공허를 심심치 않게 듣곤 한다.
즉 하나의 주체로서 맺고 있는 타자와의 관계, 즉 자신의 내면의 주도권을 경유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진정한 발전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신경증자가 분석을 통해 무의식(분열의 현실)으로 여정을 떠나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과 동일하지 않을까? 이것이 라캉 정신분석이 내담자를 분석 대상이 아닌 분석 주체로서 바라보는 이유이자 정신분석이 말하고자 하는 욕망의 윤리다.
*본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영화 《스탠바이, 웬디》(Please Stand By, 2017)의 스틸컷 및 화면 캡처입니다. 이미지는 비평 목적의 인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