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지향이 다른 파트너와의 결혼
10월 9일 자로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He’s gay. She’s straight. They’re happily married."라는 기사를 읽고, 한참 동안 멍하게 화면을 보고 있었다. 동성애자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이 결혼해서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둘은 서로의 성적 지향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부부가 되어 십 년 가까이 함께 살고 있다. 기사는 이를 '라벤더 결혼'이라 불렀다. 한때는 동성애를 감추기 위한 위장의 도구였던 용어가, 이제는 공개와 합의를 전제로 한 새로운 형태의 결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기사 읽기를 마치고 나서도 몇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왜 결혼했을까. 결혼에서 성생활이 차지하는 중요도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결혼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이들은 정말 다른 선택을 한 걸까. 이면지 뒷 장에 끄적이던 메모는 이렇게 길어져서 마치 에세이처럼 보이게 되었다.
성적 지향이 다른 두 성인이 결혼을 한다는 건, 언뜻 모순처럼 들린다. 결혼은 오랫동안 성적 매력과 낭만적 사랑을 전제로 한 계약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사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관계를 '영적 탯줄 (spiritual umbilical cord)로 연결된 동반자 '라고 표현했다. 성적 매력은 없으나 정서적 친밀감과 돌봄이 충분히 깊었고, 그것이 법적 사회적 결속의 이유가 되었다는 설명은 사랑의 형식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부부는 두 사람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를 가졌지만, 그 행위는 이들에게 관계의 중심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옵션이었다. 성적 결합이 부재하거나 최소화된 관계 속에서도, 결혼이 유지되고 심지어 번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몸소 증명하고 있다.
이런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결혼 생활에서 성생활의 의미가 점점 축소되고 있는 현대 결혼의 흐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 결혼은 재생산, 경제, 명예와 결합된 총체적 제도였고, 성생활은 그 중심에서 생물학적 지속을 보증하는 핵심 기능이었다. 그러나 피임과 재생산 기술의 발달, 여성의 경제적 독립, 개인의 자율성 증대는 성생활을 결혼으로부터 분리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제 많은 부부가 '리스 결혼'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둘 사이의 혼인관계를 지속한다.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더라도 성관계 대신 의료적 도움을 선택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결혼이 더 이상 성적 독점의 울타리가 아니라, 상호 돌봄과 정서적 안정의 계약으로 재정의되는 중이다. 성적 지향이 다른 파트너와의 결혼은, 그 재정의의 극단이자 선명한 증거다. 이들은 처음부터 성적 결합을 결혼의 조건으로 삼지 않았기에, 오히려 관계의 다른 요소들 — 존중, 신뢰, 책임을 더욱 세밀하게 가꿀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성생활과 결혼생활을 분리할 수 있다면, 굳이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최근 많은 젊은 세대가 결혼을 회피하고, 자유로운 성적 관계만을 선택하는 흐름은 이 질문의 다른 답처럼 보인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법적 의무, 경제적 책임, 사회적 기대를 동반하므로, 오직 성적 만족과 낭만적 순간만을 원한다면 결혼은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반면 성적 지향이 다른 파트너와의 결혼은, 성생활 대신 안정과 돌봄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는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예컨대 기사에 등장한 여성들은 "게이 남성은 가부장적이지 않고, 감정적으로 열려 있다"라고 말했다. 이성애 남성과의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겪었던 권력 불균형과 정서적 단절을 피하고, 대신 평등하고 섬세한 동반자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 결혼은 성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삶의 설계와 감정 노동의 분배를 위한 플랫폼이 된다.
물론 장단점은 분명하다. 성적 지향이 다른 파트너와의 결혼은 성적 긴장으로부터 자유롭고, 젠더 역학의 왜곡을 피할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성적 의무를 지지 않으므로, 거절의 상처나 욕망의 불일치에서 오는 갈등도 적다. 대신 이들은 돌봄, 경제, 양육이라는 실질적 영역에서 상호성을 확인하며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결혼은 성적 친밀감이라는 강력한 접착제를 잃는다. 육체적 교감이 주는 비언어적 신뢰와 호르몬적 결속력이 없는 상태에서, 정서적 유대만으로 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실험 중이다. 또한 사회적 고립의 위험도 있다. 기사 속 치료사가 경고했듯, "이런 커플은 거의 벽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성애자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퀴어 커뮤니티는 '이성애 결혼'으로 오해하며,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중간함이 이들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결혼을 아예 하지 않는 선택과 어떻게 다를까. 결혼 회피자들은 자유와 유연성을 택한다. 관계가 식으면 떠날 수 있고, 새로운 매력이 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불안정성과 고독의 대가를 치른다. 아플 때, 늙을 때, 외로울 때 돌봄을 보장받지 못한다. 반면 성적 지향이 다른 파트너와의 결혼은, 자유의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안정성과 연속성을 얻는다. 두 사람 모두 성적 매력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의 토대가 나이나 외모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히 뜨거운 사랑'을 약속하지 않는 대신, '오래 유지되는 동맹'을 설계한다. 결혼 회피가 낭만을 지키려는 선택이라면, 혼합 지향 결혼은 낭만을 해체한 뒤 그 자리에 현실을 배치하는 선택이다.
이 모든 생각을 정리하며 깨닫는 것은, 결혼이란 결국 이유의 조합이라는 사실이다. 사랑, 성생활, 재생산, 경제, 양육, 돌봄, 사회적 인정 등 여러 이유 중 어느 것을 중심에 놓느냐에 따라 결혼의 모양이 달라진다. 20세기의 결혼은 이 모든 것을 한 묶음으로 제시했고, 사람들은 그 패키지를 통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묶음이 풀렸다. 어떤 이는 성생활과 낭만만 취하고 제도는 거부한다. 어떤 이는 돌봄과 안정을 위해 결혼하되, 성생활은 다른 곳에서 찾는다. 또 어떤 이는 성적 지향이 다른 파트너와 결혼해, 아예 성생활을 관계의 변수에서 제거한다.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각자의 선택이 어떤 이유에 기반하는지를 정직하게 아는 것, 그리고 그 이유를 파트너와 투명하게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의 아름다운 가치는 형식이 아니라 합의에서 나온다. 누구를, 왜, 어떻게 사랑할지를 스스로 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지는 것. 그것이 결혼이든 비혼이든, 이성애든 동성애든, 성적이든 무성애든 상관없다. 기사 속 부부가 보여준 것은 어떤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이다. 결혼이 더 이상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는 시대에, 각자의 문법으로 관계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그 여러 문장을 읽으며, 결혼의 본질이 사랑의 형식이 아니라 삶의 지속이었음을 다시 생각한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 같은 집에 머무르는 일, 그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이 정직하다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