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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l 07. 2019

누구나 가슴 속에 선 하나쯤은 긋고 살고 있잖아요.

<우리들>(2016), <더 스퀘어>(2018), <기생충>(2019)

“야, 이선! 너 금 밟았어.”
    

  영화 <우리들>에서 주인공 ‘선’(최수인)이를 향한 첫 대사다. 선이는 “나 안 밟았어.”라고 작은 목소리로 얘기해보지만 진실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다. 그저 따돌림 당하는 선이를 향한 ‘쟤는 또 왜 저래’라는 시선과 경기의 질서가 헝클어지지 않고 빨리 속행하기를 바라는  들뜬 마음들뿐이다. 영화는 함께 팀을 짓고 싶은 아이들을 나눠가는 장면에서 간절하게 속해지기를 바랐던 선이의 모습과 피구 경기에서 ‘금을 밟았다’는 소동을 통해서 선이가 교실에서 얼마나 소외된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영화는 선이와 지아 그리고 보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들이 관계를 두고 긋는 선, 그리고 그 선을 상대가 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아이들은 돈, 가족 관계, 성적 같은 요소들로 선을 그어 영역을 나눈다. 그리고 그 영역 밖에 있는 사람은 철저하게 소외시킨다. 한번 박힌 이미지는 쉽게 전복되지 않는다. 그렇게 끝내는 그들이 그은 선 밖으로 밀려난 선이와 지아, 두 사람이 교실이라는 생태계에서 최약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가장 치열하게 다툰다. 두 인물은 모두 ‘냄새’나는 사람들이다. 보라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들을 선 밖으로 몰아낼 때 이런 말을 던져 박는다.     



“야 근데 쟤 좀 이상한 냄새 나지 않아?”     


  친구들에게 이 말을 들은 선이는 자신의 냄새를 맡는다. 영화 <기생충>에도 주인공이 자신의 냄새를 확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전원 백수인 ‘기택’(송강호)의 가족이 ‘동익’(이선균)의 집에 전원 위장취업을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의 일이다. 막내의 생일을 맞아 캠핑을 떠난 동익의 가족. 호화로운 빈 집을 기택의 가족이 점령하고 있다. 술을 마시며 흥청스럽게 보내던 그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동익의 가족이 캠핑을 취소하고 집으로 들이닥치자 그들은 급하게 거실 탁자 밑으로 숨는다. 그리고는 바로 옆 거실 소파 누운 동익 부부가 잠들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린다. 동익 부부는 그들 집에서 일하는 기택 가족의 냄새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오래된 무말랭이 같은’ ‘지하철에서 나는’ 냄새. 그 말에 기택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냄새를 확인한다. 냄새는 피할 수 없다. 동익은 ‘선을 넘는’ 사람을 싫어한다. 하지만 기택의 가족이 아무리 조심을 해도 그들의 냄새는 항상 선을 넘는다. 

  영화 <우리들>의 아이들이 관계를 규정하며 그은 선이 “(걔가 금 안 밟은 거)내가 다 봤어!”라는 한 마디에 해소될 수 있었다면, <기생충>에서의 선은 해소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더욱 공고해진다. <기생충>에서 ‘돈’으로 날카롭게 나뉜 부와 빈의 간극은 이제는 사회 구조적 문제나 인도적인 문제가 아니라 물이 낮은 곳으로 쏟아져 내리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익의 거실 탁자 밑에서 빠져나온 기택의 가족들이 쏟아지는 비와 함께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 그리고 이어지는 기택 동네의 수해 현장은 땅으로 몰아치듯 흘러내리는 폭우를 통해 부와 빈의 낙차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또한 <기생충>에서 흥미로운 장치 중 하나는 무너지지 않는 ‘집’이다. 피가 솟구치는 ‘냄새에 대한 복수’의 현장이 되어버린 ‘남궁현자’ 선생님의 집도, 수해로 물이 턱까지 차오른 기택의 집도 그 안의 인물들이 어떤 수난을 겪든 그 자리에 공고하게 서 있다. 특히 ‘남궁현자’의 집은 영화 속 ‘기생’의 구조를 가장 함축적으로 담은 공간이다. 이 공간은 ‘집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정해진 부의 선이 있고, 그 선은 세대를 거쳐도 변하지 않고 적용되며 아래서 위로의 역전이나 전복은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다. 그저 ‘기생’정도만 겨우 허락한다. 그것도 냄새를 비롯한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차단된 형태로. 어느 한 쪽이든 집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들의 위태로운 동거는 해소되지 않는다. <기생충>의 집은 부와 빈을 구획 지은 지워지지 않는 선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을 주고 산’ 것에 대한 소유는 명확하다. 돈을 지불한 사람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더 스퀘어>에서 제시되는 사각을 이루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을 만드는 선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질문하게 된다. 영화 <더 스퀘어>는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안’(클라에스 방)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겪는 해프닝들을 엮어낸다. 그리고 그가 한편으로는 배려하고 한편으로는 냉소하는 사건들을 통해 난민을 향한 차별의 시선을 풍자한다. 

  현대 미술관 앞에 놓인 작품 ‘더 스퀘어’는 사각형의 선이다. 작품의 의도는 이러하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이 안에서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현대 미술관 앞에 놓인 이 선 안에 들어올 사람들은 꽤나 제한적이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 가장 가깝게는 그 국가에서 돈이 많고 문화에 관심 많은 엘리트층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문화와 예술’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그들이 대중을 향해 예술이라는 형태로 베푸는 이 ‘더 스퀘어’라는 작품이 얼마나 협소한 공간인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위선은 영화 속의 ‘유인원 퍼포먼스’를 통해서 샅샅이 벗겨진다. 



  유인원을 자처한, 이미 유인원 자체인 퍼포먼스 예술가가 전시의 개막행사를 찾은 엘리트들의 행사에 뛰어든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유인원 흉내를 내던 그는 차례로 그 엘리트들의 위선을 벗겨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예술가를 괴롭힌다. 결국 그는 불쾌함에 자리를 뜬다. 그 다음에 크리스티안이 퍼포먼스 종료를 종용하듯 찬사의 박수를 유도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작품은 끝나지 않는다. 다음부터가 진짜다. 이번 표적은 히잡을 쓴 여성이다. 사람들은 유인원이 그녀의 히잡을 벗기고 그녀들이 도망칠 때까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유인원이 한 여성 관객을 겁탈하려고 하자 그제야 그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든다. 이 하나의 장면을 통해서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폭력에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여인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과, 남성에 대한 접촉, 심지어 문화적인 폭력까지도 ‘문화 엘리트’층은 용인한다. 그리고 끝내 ‘겁탈’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고서야 그들은 폭력에 반응한다. 그들이 폭력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왜냐면 그들은 어떤 지점에서는 웃었고, 어떤 지점에서는 종료를 종용하는 박수를 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폭력의 강도가 강해지자 그들은 행동을 멈추었다. 공포는 쉽게 위선을 벗겼다. 그들은 ‘엘리트’라는 공동체를 벗고 개인이 되어 침묵한다. 그리고 그 개인들은 문화와 예술에서도 배려와 신뢰와도 먼 그저 이기적인 동물 한 마리일 뿐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이런 모순된 장면들을 배치한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난민으로 추정되는 노숙인들 앞에서 “생명을 구하겠습니까” 라고 외치는 누구를 구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앞에 놓인 노숙인들은 절대 아닌 구호단체가 그렇고, 그 둘을 당연하다는 듯 외면하고 출근길에 나서는 거리의 사람들이 그렇다. 또한 자신의 핸드폰과 지갑, 할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커프스를 도둑맞은 크리스티안이 ‘정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핸드폰의 마지막 위치인 아파트를 찾아가 한 집 한 집 협박편지를 넣는 것 또한 그렇다. 후에 크리스티안에 의해 가족들에게 도둑으로 몰렸다며 항의하는 소년의 인종을 보아 그 곳 또한 ‘떠나온’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크리스티안은 끝내 소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다. 인정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너무 늦게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사각의 이미지는 곳곳에서 반복된다. 그 중에서도 계단을 위에서 찍으면서 위에서 아래로, 깊은 공간 끝에 사각을 보여준다. 계단은 그 사각을 기준으로 나선형으로 오르게 만들어져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크리스티안은 그 사각을 맴돌 뿐 그 사각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이민자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러 자신의 딸들과 함께 계단을 오르는 그의 모습은 힘겨워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힘에 겨워도 그는 끝내 사각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이민자 소년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지 못한다. 

  하지만 <더 스퀘어>의 선은 <기생충>만큼 희망이 없지는 않다. 영화는 크리스티안이 아니라 그 다음 세대, 그의 딸들을 통해서 희망을 전한다. 크리스티안은 큰 딸의 치어리딩 대회를 찾는다. 거기서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공중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를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아래서 친구들을 받치고 공중으로 던져주는 아이들이다. 완성된 퍼포먼스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한 이타적인 마음들을 본 그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이방인을 향한 고집스러운 이기심을 깨닫는다. 이 영화는 이 부분에서 앞선 영화들과는 다르게 자기 반성적이다.


 

  <우리들>과 <기생충>은 그어진 선에 대항한 개인이 구조에 패배한 채로 자신들끼리의 희망과 위안을 찾았다면, <더 스퀘어>는 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자들의 위선을 꼬집으며 그들의 자기반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독특하다. 하지만 <더 스퀘어>의 선이라는 것이 과연 그들만의 것인지에 대해서 묻는다면 ‘누구나 가슴 속에 선 하나쯤은 긋고 살고 있지 않나요’ 라고 답할 것이다. 은연중에 ‘혐오’하던 다름이 있고,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고 쉽게 비난’했던 사회적 문제가 있었을 것이며, 몸이 먼저 반응해 차마 숨기지 못했던 ‘역한 감각’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 <더 스퀘어>는 우리의 편견들에 말한다. 그것 또한 인간이기에 겪는 ‘과정’의 일부라고. 그리고 절대적으로 그것이 과정이기를 희망한다. 비록 우리는 그 희망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추악한 자신의 편견을 마주하면서 무너지고 반성하며 순간순간 흔들리고 무너지겠지만, 이를 통해 다음 세대는 편견 없는 세상에서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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