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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l 13. 2019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

<미드소마>, 아리 애스터, 2019

  아리 애스터 감독은 <유전>을 통해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한 한 가족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그려냈다. 파탄을 피하기 위한 가족의 저항은 감독이 짜 놓은 악마 소환 의식의 큰 흐름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미니어처의 아주 작고 공허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아리 애스터는 삶에 수반되는 필연적인 것들을 기묘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유전>에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대대로 생을 이어가며 내려오는 저주의 굴레를 그려냈다면 이번 <미드소마>에서는 가족에서 시작한 트라우마를 공동체로 확장해 그 저주의 영역을 넓혔다.

  <미드소마>는 처음부터 영화가 나아갈 방향을 네 폭의 제단화 형태로 보여준다. 이제부터 인물들은 죽음을 겪고 생명으로 나아갈 예정이지만, 그들이 가 닿는 생명의 공간이 과연 축복인지는 영화를 계속 들여다봐야 알 일이다. 영화는 극을 열며 제시한 제단화처럼 영화 곳곳에 그림을 두어 앞으로 있을 비극들을 예지한다. 제단화가 열리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영화는 운명의 시점에서 한 가정을 지목한다. 깊은 밤 모두가 잠든 마을에 울리는 전화 벨소리. 받지 않는 벨소리가 반복될 때마다 영화는 시점을 좁혀서 한 부부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잠든 것처럼 보이는 부부가 있고, 부부는 끝내 딸의 수신을 받지 못하고 그들의 딸 ‘대니’(플로렌스 퓨)의 음성메일이 그들 가정의 위기를 암시한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대니는 어디에도 연결되어 있지 못하고 홀로 고립되어 있다. 그녀가 부모에게 보내는 신호는 밤을 깨울 듯이 울리지만, 그들에게 닿지 못한다. 그리고 대니의 닿지 못한 전화는 곧 비극의 신호가 된다. 오랫동안 조울증에 시달려 종종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고는 했던 동생이 자동차 매연을 마시고 자살한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은 자살과 동시에 살해를 감행했다. 부모님의 방을 밀봉하고 그곳에도 매연을 넣어 함께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유전>에서도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사고가 있었다. <유전>에서 가족 간의 살인이 가정의 갈등을 폭발시키면서 긴장을 더했다면, 동일한 사건은 <미드소마>에서는 더 심화된다. 죄를 물을 가족마저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대니는 가족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유대를 필연적인 사건으로 잃는다.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 항의하지 못하고 유대를 잃은 상실감에 ‘가족’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쉽게 무너져 내린다.

  가족이 사라진 대니는 더욱 관계에 집착하고 희생한다. 그녀의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잭 레이너)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관계이다. 그렇기에 크리스티안이 자신에게 이야기 하지 않고 스웨덴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그녀는 “괜찮다”라고 한다. 대니는 자신의 감정을 관계의 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희생한다. 크리스티안의 친구들 앞에서 가족을 잃은 자신의 깊은 심연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화장실에서 눈물을 쏟는가 하면, 함께 따라간 스웨덴의 ‘하지제’에서도 내키지 않았던 마약을 함께 먹는다. 마약을 한 그녀는 그곳의 땅과 하나 된 환영을 보게 된다. 생일 날 당도한 그곳에서 대니가 묘한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펠레가 초대한 공동체 ‘호르가’는 유럽의 전통문양이 새겨진 하얀 옷을 입으며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그들만의 전통을 유지하며 생활하고 있다. 대니와 친구들이 그들에게 오는 길이 하늘과 땅이 뒤집힌 모습으로 비춰졌던 것처럼 그리고 낮과 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스웨덴의 백야처럼 공동체 호르가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정지된 듯한 모습이다. 영화는 호르가에 입장하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생명의 이미지를 더해간다. 극에 달한 것들은 불안을 가져온다. 생명 또한 그렇다. 팽창하듯 자라나는 여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가올 죽음의 계절뿐이다. 90년에 한 번 9일 동안 벌어지는 생명과 번영을 위한 축제. 생명이 넘쳐흐르는 그 곳에서 죽음을 머금은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호르가라는 공동체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아리 애스터 감독이 오랜 기간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의 신화들과 토속문화들을 조사해 만들어 낸 섬세한 세계이다. 그 세계는 생명의 순환을 받들고 있다. 그들이 생명에 대한 숭배는 가히 집착적이기까지 한데, 생애주기를 9의 배수로 맞춰 72살에는 모두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1에서부터 9까지 자라나는 것에는 무한한 축복을 보내지만 10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10이 아니라 0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것을 규율로 삼는다. 이러한 그들의 풍습을 인류학을 전공하는 크리스티안과 친구들은 ‘문화’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문명이 원시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접근한다. 그들이 호르가의 기괴한 풍습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문명이 원시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관용과도 같다. 그들의 ‘이해’에는 연구라는 이름의 명분과 거리 감각이 존재한다. 그들의 관용은 사람들을 약탈해 인구를 넓혀온 바이킹의 문화를 잇고 있는 호르가에서는 그들 앞에 놓인 불운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림막이 된다.

  크리스티안과 친구들이 그들을 연구 대상으로 관계하려 한다면 대니는 이방인으로서 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다가 끝내는 그들과 하나가 되는 인물이 된다. 결정적으로 대니를 움직인 것은 ‘감정’까지 공유하는 그들의 문화다. 호르가는 성애의 신음도, 배신의 눈물도 함께 호흡한다. 대니는 끊어지지 않을 이 강한 연대에 점차 동화된다. 영화는 이러한 그녀의 심적 움직임을 호흡하는 자연으로 표현한다. 열기에 일렁이는 듯한 풍경, 대니의 몸에서 자라나는 풀이나 대니와 함께 호흡하는 화관의 꽃처럼. 대니는 호르가의 인물들, 호르가라는 공동체를 넘어서 그들이 숭배해 마지않는 무한한 생명력과 호흡하고 있다.

  아리 애스터는 전작 <유전>에서는 운명에 저항하는 인물들을 먼 지점에서 관조한다. 애초에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들은 정해진 운명에 무력하게 빨려 들어갈 뿐이다. 하지만 감독은 <미드소마>의 대니에게는 선택이라는 선물을 쥐어주었다. 영화의 결말, 감독의 선물을 받은 그녀의 표정을 주목해보자.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영화 속에서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진 처참한 비극들을 뒤집을만한 메시지를 던진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미드소마>에서의 죽음은 그 반대이다. 멀리서 보면 영화 속 죽음들이란 처참하기 그지없지만, 대니라는 한 개인에 가까워질수록 그 죽음은 그녀를 위한 한 편의 희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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