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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Oct 03. 2019

나의 양심은 얼마?

<배드 지니어스> , 나타우트 폰피리야, 2017

  천재소녀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은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에도 장학금을 받고 유명 사립학교에 입학했다. 학교가 낯선 린에게 처음 손을 내밀어준 친구는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이다. 둘은 그렇게 첫 만남에 단짝이 된다. 

  그레이스는 연극부에 들어가고 싶지만, 성적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다. 연극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정 평점이 되어야 하는데, 수학 성적이 좋지 않아 평점을 깎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린은 그레이스에게 수학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시험 당일 그레이스는 전에 봐왔던 문제임에도 우왕좌왕하며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 린은 결심한다. 자신의 답을 뒷자리의 그레이스에게 전달하기로. 그레이스와 앞뒤로 앉아 30c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지만, ‘정해진 시험 시간 안에’, ‘걸리지 않아야’ 하기에 두 사람의 사소한 행동들은 긴박한 첩보활동이 된다. 컨닝은 성공적이었고, 그레이스는 순조롭게 연극부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레이스의 남자친구 ‘팻’(티라돈 수파펀핀요)의 호화로운 파티에 초대받은 린. 그녀는 팻에게 달콤한 제안을 받게 된다. 한 과목당 금액을 붙여 답안을 팔라는 것이었다. 린은 흔들린다. 팻이 제시한 금액에도, 그리고 자신의 양심 앞에서도. 하지만 린은 자신의 답안지를 공유하기로 한다. 그 돈이면 생활비는 물론이거니와 해외 유학을 위한 종자돈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학교는 선생들이 돈을 받고 시험문제를 파는 일이 횡행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피라미의 작은 일탈 정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을 무사히 보내고, 2학년이 되자 린의 라이벌인 노력형 천재소년 ‘뱅크’(차논 산티네톤쿨)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린의 컨닝 사업은 위기를 맞는다. 가격 경쟁 이전에 양심의 벽이 높고 단단한 뱅크가 린의 컨닝 사업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영화 <배드 지니어스>는 잘 닦아놓은 린의 앞길에 뱅크라는 인물을 통해 제동을 건다. 그가 이야기에 브레이크를 밟자 떠오르는 생각은 ‘린은 어떻게 이 위기를 빠져나갈 것인가.’이다. 우리는 린이 그 천재적인 머리로 또 한 번 이 위기를 빠져나가기를 바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컨닝을 보는 우리는 해방감과 통쾌함을 느낀다. 여타 다른 케이퍼 무비들을 보았을 때처럼. 실은 범죄자들의 능수능란한 범죄를 따라가는 일보다, 린의 컨닝 사업에 더 큰 일탈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컨닝’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한 번쯤은 생각해봤던 일이기도 하니까.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그동안 컨닝을 하지 못한 것은 과연 진정 나의 양심 때문이었을까? 되묻게 한다. 내가 만약 린처럼 천재적인 컨닝 시스템을 발견한다면, 심지어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걸 마다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심각한 쫄보라서 시도조차 해보지 못할 수는 있지만, 한 번 성공을 맛보고 통장에 돈이 꽂히는 순간 나의 마음은 요동칠 것 같다. 돈이 무서운 점이 이 부분인 것 같다. 어떤 행동이든 간에 ‘보상’으로 작용한다는 점. 그 보상이라는 개념으로 인해서 나의 행동은 나의 일부를 동원한 ‘노동’이 된다. 심지어 그것이 불법일지라도. 린의 학교처럼 돈을 기반으로 한 불법이 횡행하는 시스템 안이었다면, 불법에 대한 나의 눈의 돈 앞에서 흐려지는 일이란 어쩌면 시간과 ‘겁’의 문제 이지 않을까. 그 ‘겁’이라는 것에 양심과 준법의식 그리고 본능의 함량은 얼마나 될 것인가. 어쩌면 나는 겁을 잘 학습했기 때문에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의 순수한 지점 어딘가에는 돈 앞에서 흔들리는 부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깨달았다. 단지 별 다르게 ‘배드’하지도 ‘지니어스’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돈을 향한 무지막지한 욕망을 품고도 무탈한 소시민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영화가 끝에 닿으면 뱅크와 린의 위치는 정반대가 된다. 돈에 흔들린 뱅크는 더 큰 판을 벌이기 위해 궁리하고, 컨닝과 돈에 얽힌 일들에 지친 린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의 범법행위를 자백한다. 참 교훈적인 결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다가 아니잖아’ 라는 생각이 맴돈다. 

  결국 그들 위에 군림했던 돈의 절대적인 위신은 훼손되지 않은 채로 끝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게서 지위를 빼앗을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제동장치를 걸 수 있다. 개인의 양심, 그 이상의 것으로. 하지만 이제는 그 조차도 돈으로 사고파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 돈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회를 굴리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영화는 그 사회의 범위를 잘라내어 그나마 ‘양심’이 작용할 수 있는 교실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꾸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양심이 숨 쉴 수 있는 환경에서 나의 양심의 가격은 얼마일까. 머릿속 계산기를 들고 셈을 해보지만, 어떤 수를 붙여도 채워지지 않고 씁쓸한 뒷맛만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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