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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Sep 10. 2019

‘아빠의 청춘’과 ‘개똥벌레’ 그리고 ‘그 뻔한 말’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 실뱅 쇼메, 2014

  매일 같이 고장이 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프랑스의 오래된 아파트. 그 아파트의 3층과 4층 사이 계단에는 집이 하나 있다. 문도 따로 달지 않고 계단 벽을 뚫어 문을 만든 그 집에는 ‘마담 프루스트’가 살고 있다. 그녀는 그 아파트의 신비주의자다. 그녀가 걸친 알록달록한 옷만큼이나 독특한 관점으로 세상을 꿰뚫어보는 마담 프루스트. 한 편에서는 남들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그녀를 골칫덩이라고 부르지만, 그녀의 집에는 매일 같이 사람들이 드나든다. 마담 프루스트에게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녀를 찾는 것일까?

  그녀의 아파트에는 두 살에 부모를 잃고 벙어리가 된 ‘폴’과 그를 거두어 피아니스트로 길러낸 이모들이 살고 있다. 폴은 우연히 자신의 피아노를 봐주는 맹인 조율사가 떨어뜨린 LP를 주워주다 마담 프루스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햇빛이 비치는 아늑한 정원과 그 가운데 놓인 티 테이블을 만난다. 마담 프루스트를 찾아오는 이들은 그곳에서 그녀가 건네는 차 한 잔과 마들렌 한 입을 베어 문 후 깊은 기억 속으로 빠진다. 그리고 각자의 추억 속에서 그들은 현재를 치유 받는다.

  마담 프루스트는 폴의 부모와 관련된 기억을 마주하고는 어린 시절에 갇혀 말을 잃은 불행한 그를 트라우마에서 꺼내주기로 마음먹는다. 프루스트가 남긴 쪽지를 받고 자신의 정원으로 찾아온 폴에게 그녀는 차와 마들렌을 건넨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기억을 잃고 길쭉한 모든 것들이 아스파라거스로 보이는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다. 폴은 프루스트가 틀어주는 음악을 따라 유년의 기억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폴과 프루스트의 추억 낚시가 시작된다.

  영화에서 추억은 음악에 기록된다. 음악은 기억보다 강력하게 과거의 순간과 감정에 흡착되어있다. 그렇기에 음악을 꺼내 올리면 추억이 함께 딸려져 나오는 것이다. 기억보다 선행된 음악은 누추한 기억들을 재구성한다. 음악이 선사하는 곡조와 리듬을 따라서 기억들은 춤을 춘다. 마담 프루스트의 기억 치료에는 음악이 필수다. 음악이 없는 날 것의 기억은 누추함을 넘어서 처참하기까지 하다. 이런 날 것의 기억을 직접 목도하는 일은 상처를 낫게 하겠다고 상처를 헤집는 일과 같다. 상처는 상처와 함께 곁을 보듬을 때 치유가 된다. 곁을 토닥거리는 손길과 거리를 두어 호호 불어주는 입김이 바로 마담 프루스트에게는 ‘음악’인 것이다.

  마담 프루스트와 폴의 ‘기억 유랑’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기억은 어디에서 고여 있는지 되짚게 된다. 그곳에서도 음악이 빠져서는 안 된다. 음악이 빠져버린다면 그 기억이란 도리어 독이 될 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나는 우리 가족의 ‘애창곡’에 대한 기억을 꺼냈다.

  하나 같이 노래를 못하는 음치 가족이지만, 그럼에도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아빠 덕분에 나의 유년에는 노래방에 대한 기억이 많다. 노래방을 가는 것에는 항상 앞에 외식이 선행된다. 노래방을 먼저 가거나, 노래방만 가거나 하지 않는다. 동네의 단골 돼지갈비 집에서 외식을 하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노래방을 들렀다.

  나는 남겨져서 홀로 불을 깜빡이며 기다리는 방들은 항상 낯설고 외로워보였다. 벽과 천장에 꾸며진 여신들이 뛰노는 샘물에 돌고래가 뛰어오르는 이 세상 풍경이 아닌 풍경화들은 지상에서 쏟아내지 못한 고조된 감정을 질러내기 위한 공간을 바라보는 나에게 낯선 감각을 더해주었다. 텅 빈 노래방과의 첫 만남에는 긴장과 처연함이 있다. 처연한 감정은 이 곳에 남은 적막이 누군가가 뜨겁게 노래하고 떠나간 곳이라는 점에서 온다. 반면, 긴장에는 우리가 곧 그 적막이 깨부술 것이라는 묘한 흥분이 섞여있었다. 나는 언제나 첫 곡을 부르지 못하고, 머쓱하게 남이 먼저 이 적막을 휘저어 주기를 기다렸다.

  보통 적막을 휘젓는 사람은 노래를 좋아하는 아빠였다. 아빠의 애창곡은 <아빠의 청춘>이었다. 모든 애창곡이 그렇듯 이 노래도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몇 곡을 부르고서 중반쯤에 등장했다. ‘이 세상에 부모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 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라는 가사로 너울너울 흘러가는 이 곡의 절정은 다 같이 외쳐주어야 하는 “브라보, 브라보!”에 있다. 함께 간 사람들은 모두 아빠의 청춘에 ‘브라보’를 외쳐주어야 한다. IMF로 직장을 잃어 불안정하게 가계를 이어가는 가장에게 가족들이 외쳐주는 ‘브라보’는 한 곡의 몇 초 되지 않는 순간이었지만, 상처에 불어주는 입김처럼 비록 효과는 미비하다 못해 없다시피 할지라도 꺾인 삶을 다시 일으키는 큰 위안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어릴 적에는 곧잘 아빠를 향해 브라보를 외쳐주었지만, 머리가 크면서 동생과 나는 취한 채 목소리만 높이는 아빠의 노래에 시큰둥했고 오직 엄마만이 아빠의 청춘에게 ‘브라보’를 외쳐주었다.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다. 목청도 좋고 목소리도 좋다. 그렇지만 박자감각은 없어서 엄마는 정박의 노래들을 또박또박 부른다. 그런 엄마의 애창곡은 <개똥벌레>이다.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엄마는 곧은 자세로 마이크를 잡고 서서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엄마가 개똥벌레 같아 보였다. 엄마는 남편이 인생의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는 와중에 가장이 되었다. 집에는 인생이 남긴 상처를 술로 달래는 남편과 아기 새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돈과 젊음을 삼켜버릴 어린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에서 엄마는 언제나 혼자였을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엄마의 노래에는 함께 외쳐줄 ‘브라보’가 없었다. ‘나는 개똥벌레’라서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가족의 손을 잡고 싶었을 텐데, 우리는 그 손을 잡아주지 않고 자라나버렸다.

  내가 ‘애창곡’으로부터 건져 올린 기억들에는 엄마와 아빠의 지난한 세월이 녹아있다. 한 구절 한 고비 꺾어 넘을 때마다 우리의 인생사들이 녹아있는 것이 애창곡이다. 당시의 나의 애창곡은 쿨이나 이정현의 노래였다. 그저 신나게 목청을 높이면 되었던 시절이었다. 가족 앞인데도 나는 너무 수줍어서 그 노래를 부를 때에도 이 노래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노래방에 대한 대부분의 기억은 부모님의 애창곡이었다. 그 후로 나는 노래를 음악시간 실기 시험 외에는 부르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애창자가 아닌 애청자로 바뀌게 되었다. 수많은 곡을 애청하며 들었지만, 나를 가장 강하게 흔드는 곡은 정인의 <그 뻔한 말>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집은 층과 층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는 그녀의 일, 트라우마에 묻힌 기억을 발굴해 내는 일과 연관이 있다. 마담 프루스트는 층과 층으로 분명히 구분되어있는 기억이 아닌 그 사이의 균열과도 같은 기억을 치유로 메워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층이 아닌 사이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나의 <그 뻔한 말>에 얽힌 기억이란 층과 층 사이, 절대적으로 묻어두고 싶지만 층에서 층으로 걸어 올라오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계단 난간 어딘가에 있다. 그 곡만 들으면 나는 항상 2013년, 늦은 봄까지 가시지 않았던 한기를 느낀다.

  그 시절 나는 군대에서,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앓고 있었다. 상태가 심각해지면서 군병원과 외부의 정신병원 진료를 받았다. 외부 진료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군 병원에서 남은 기간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 뻔한 말>을 들었다. 매일 같이. 그것도 같은 시간에. 항상 케이블 음악 채널을 틀어놓고는 했는데, 그 곳에서는 언제나 당시에 나온 최신 곡들을 반복적으로 틀어주었다. 나는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그 뻔한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지점에서 공감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곳에서 부정당하고 연결이 끊긴 것 같은 절망에 빠져 있었고, ‘니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었어, 너만 내 곁에 있어주면’ 이라는 노래의 마지막 말에 붙들렸다. 나도 노래 속의 그녀처럼 한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불안 속에서 모든 감각에 놀라고 상처받는 나, 우울에 갇혀서 삶에 대한 일말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나의 곁에 있어줄 한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군 생활에서는 그 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계속 병원과 병원 사이를 부유하다가 사회로 방출되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내내 이 노래만 들으면서 죽은 듯 누워 지냈다. 낮도 밤도 없이 그저 나를 당기는 중력만을 느끼면서. 나는 아직도 이 노래를 들으면 4월이 되어도 여전히 서늘했던, 병원의 한기를 느낀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우울증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어쩌면 그 한기를 나는 영원히 안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마담 프루스트의 능력은 기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에 음악을 섞어 그것을 현재의 인생에 비료처럼 활용하는 것에 있다. 나는 내 인생의 한기를, 엄마의 외로움과, 아빠의 허름한 청춘을 씻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을 만나 덩실 거리는 기운과 또박또박 걷는 리듬 그리고 공허한 감정을 터뜨리며 쏟아내는 목소리를 거치면 인생이 남기는 상처의 기억들이란 삶을 앞으로 밀어 올리는 계단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상처를 디딤돌로 만드는 방법 하나를 알려준다. 상처를 음악으로 씻어내는 것. 상처와 음악이 붙어 있지 않아도 괜찮다. 그 언저리의 음악, 참았던 감정을 터뜨리게 하거나 마음을 다독이는 음악일 지라도 좋다. 음악으로 기억된 상처들은 음악이 흐르는 시간만큼 우리 앞에서 춤을 추다가 음악이 끝나는 그 때 함께 쓸려나갈 것이다. 그렇게 한 번 씻어낸 인생은 한 결 가벼워질 것이고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상처라는 계단을 딛고 다시 인생을 걸어 나가면 된다. 나는 지금 나를 삼켰던 어둠에서 마담 프루스트의 손을 잡고 이렇게 한 걸음 걸어 나왔다. 당신도 그럴 수 있다.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몸을 데우고, 눈을 감고 음악을 따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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