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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Nov 17. 2019

홀로 견디는 삶

<영하의 바람>, 김유리, 2019


  열아홉 ‘영하’(권한솔)의 길지 않은 삶을 돌아보면, 언제나 영하는 혼자였다. 열두 살에는 엄마가 새 아빠와 살기 위해서 어린 영하를 아빠 편에 보냈었다. 하지만 아빠는 영하가 오기도 전에 세 살던 방을 빼 종적을 감추었고, 그렇게 영하는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가지 못한 채로 거리에서 꼬박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결국 어린 영하를 맡아 기른 건 엄마와 새 아빠였다. 



  영하에게는 ‘미진’(옥수분)이라는 이종사촌이 있다. 열두 살 때부터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미진이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불안한 처지에 놓이자 영하는 미진을 극진하게 챙겼다. 통통한 미진을 ‘깃털’이라고 놀리듯 부르면서 영하는 항상 미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미진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미진과 영하의 관계는 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멀어지게 된다. 미진이 친가 식구들에게 얹혀살게 된 것이다. 어른들은 모두 떨떠름한 죄책감을 안은 채로 덤덤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지만, 영하는 그렇게 미진을 놓아줄 수가 없다. 영하가 미진을 끝까지 끌어안으려 한 데에는 열두 살에 겪었던 ‘홀로 남겨진 마음에 부는 한기’를 이미 느껴봤기 때문이다. 



  그 후로 영하와 미진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영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수능을 마쳤을 때, 미진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러 다닌다. 그렇지만 미진에게는 취업도 쉽지가 않다. 영하의 말처럼 살을 빼면 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불합격 소식에 미진의 설 자리는 날이 갈수록 좁아져 간다. 미진은 어느새 자신의 불안한 위치에 대한 감각이 잔뜩 서 있는 상태다. 반면 영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옛 상처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어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겨울, 달라진 모습의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둘 다 혼자가 된 채로.

  영하의 가정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영하는 혼자가 되었다. 영하는 새 아빠의 성추행에 놀라 도망친 것이었지만, 가족을 다시 붙일 수 없게 되자 엄마는 마치 때를 기다린 사람마냥  자취를 감추었다. 새 아빠에게도 돌아갈 수 없고, 엄마는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영하는 미진을 만난다.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관계의 안전장치가 풀려버린, 이제 막 성인이 된 두 사람을 세상은 가만두지 않는다. 계속해서 차가운 거리로, 좁은 고시원으로, 늦은 밤의 유흥으로 영하를 내몬다. 

  이빨을 드러낸 세상 속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을 들여놓는 사람은 미진이 아니라 영하다. 미진의 세상은 열다섯 살 때부터 ‘혼자’였기에 미진은 사회에 대한 눈치는 빠른 편이다. 다만 판단과 행동의 속도가 느릴 뿐. 하지만 영하는 반대다. 판단과 행동의 속도는 빠르지만, 세상에 대한 눈은 어둡다. 영하는 열두 살에 겪은 아픈 경험 이후로는 ‘혼자의 삶’에서 멀어지기만 해왔었기에 거친 세상에 빨려들기도 쉽고, 세상과 부딪칠 때의 마찰 또한 크다. 영하가 집을 나오고 나서부터 세상은 그녀를 계속 비틀거리게 한다. 

  영하와 미진은 홀로 남은 세상에서 서로에게 의지한 채 나름대로 세상의 찬바람을 뚫고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영하의 바람은 이번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찢고 세어 들어온다. ‘배신’으로 기억 될 사건을 앞두고 미진은 갈등 끝에 영하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어차피 세상은 혼자서 견디는 것이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영화는 겨울바람이 부는 밤거리를 전혀 다른 이유로 헤매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며 끝을 맺는다. 두 사람의 떠남과 만남 사이에는 눈물과 침묵이 존재한다. 눈물은 방황하는 두 사람이 세상에 상처 입은 처참한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면, 침묵은 눈빛과 눈빛으로 오직 혼자인 사람들이 서로를 공감하는 데서 나온다. 영하와 미진은 세상이 말하는 “홀로 견뎌 내는 삶”을 앓는다. 그리고 힘겹게 다시 ‘함께’에 와 닿는다. 영하와 미진이 다시 만난 순간, 그들에게 불었던 영하의 바람은 비록 계절이 바뀌는 속도만큼 아득한 속도이긴 할지라도 서서히 멎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영하의 겨울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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