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폭력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아를 찾다. 그녀의 셀프 메이드 전시회
필자는 오늘 11시부터 4시까지 에이디 스페이스(AD SPACE)라는 호주 시드니의 패딩턴에 위치하고 있는 갤러리에서 혼자 일해야 한다. 누군가 펑크를 내서 필자의 친구인 아리아가 급하게 도움을 요청했고, 필자는 친구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서 오늘 하루 이 갤러리를 지키며 친구를 도와주기로 했다. 내일은 필자의 절친인 또 다른 친구가 와서 갤러리에서 일한다. 마침 금요일 오늘은 필자가 스튜디오에 가야 하는 날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날 같으면 어림도 없다. (필자는 최근 시드니 대학교 앞에 개인 스튜디오가 생겼다. 자랑은 조만간 꼭 하겠다.)
아리아가 필자에게 금액을 지불한다고 하길래 거절했고, 대신 필자는 아티스트들끼리는 서로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맞아.(Defo는 definitely의 약자이며, 정확한 뜻은 확실하다, 분명하다는 뜻) 앞으로 너도 전시회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줘. 너의 호의에 꼭 보답할 거야." Defo. :) let me know if you need help with an exhibition in the future too. I would like to return the favor.
패딩턴에 위치하고 있는 필자의 애정 카페가 2021년에 장소를 새로 옮겨서 다시 오픈했는데..
아리아 덕분에 오늘 아침에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메뉴가 조금 바뀌었지만.. 음식 맛과 커피 맛은 바뀌지 않아서 너무 좋았다.
필자의 커피 취향은 언제나 소이라떼. (우유 대신 두유를 사용한 커피)
기분에 따라서 설탕 대신 꿀을 추가하기도 한다. 여기 소이라떼는 다른 곳보다 유독 더 크리미 하다.
이 곳에서 제일 맛있는 건 치즈 토스트. 바삭바삭.. 이 곳 카페 주인 오빠 손맛이 장난 아니다.
아마 이 곳이 시드니에서 제일 맛있는 치즈 토스트일 것이다. 필자가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커피 또한 패딩턴에서 제일 필자 입맛에는 맛있다. 돈 안 아까운 카페.
대신 샐러드 메뉴는 그럭저럭.
아침을 못 먹고 나와서 토스트와 커피를 사고 갤러리로 갔다.
갤러리 한쪽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사무실 겸 창고이다. 미술 설치 작업을 위한 온갖 공구들과 오프닝 파티 때 손님들을 위한 음료와 컵들이 구비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미술가가 가만히 앉아서 우아하게 그림 그리는 직업인 줄 아는데.. 착각이다.
공구 사용에서부터 프로페셔널한 페인트칠까지 혼자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깜깜한 갤러리 문을 열고 불을 켜면.. 작품들이 쨔쟌 하고 나타난다.
작품에 따라서 갤러리는 카멜레온처럼 변한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떻게 설치하고 배치하느냐.. 에 따라서 분위기가 확 변하는 이 공간이 나는 참 좋다. 원래 이 곳은 햇살이 많이 들어오는 밝은 공간이었는데, 아리아의 어두운 작품들을 위해서 빛이 들어오는 모든 공간을 막아버렸다.
필자의 친구인 아리아 조쉬 워터포드(Aria-Joshes Waterford)는 호주 시드니의 뉴사우스웨일즈 대학교(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UNSW)에서 미술을 공부한 행위 예술가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상당히 파격적인데, 실제 아리아의 말투는 매우 차근차근하며 사려 깊다. 그리고 매우 수줍음이 많다.
필자는 원어민이 아니라서 한국인 특유의 특이한 영어 발음을 가지고 있는데, 아리아와 아리아의 파트너가 이런 필자를 배려해줘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거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진심으로 감사하다.)
아리아의 작품들은 가정 폭력, 인권과 포용성과 같은 주제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아리아의 작업은 종종 터무니없고 혐오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이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특이한 매체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자아에 대한 주제는 페미니즘 철학에서 오랫동안 두드러졌습니다.
페미니즘은 다루어야 하는 개인의 정체성, 신체, 사회성 및 주체성에 대한 질문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부모님은 제가 부모님과 사회가 원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가부장적인 세상에서 나 자신이 되는 것은 내가 항상 예의 바르고 조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들에 대한 반항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저의 이번 전시회는 가정 폭력의 영향과 가부장적인 사회가 우리에게 어떤 정체성의 측면을 부과하는지에 대한 개인의 경험과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는 나의 사상과 자유를 구속합니다. 이제 나는 이 위험한 흐름에서 당신의 존재를 걸러냅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거절합니다. 마침내 나는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전시회의 타이틀은 셀프 메이드(Self Made)이다. 스스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잠깐 나누자면.. 필자의 친가 쪽은 남존여비 사상이 매우 강한 집안이었다. 필자의 집안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난 죄로 집안의 남자들에게 많은 기회들을 빼앗기고 살았어야 했으며, 희생을 강요당했다. 필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없이 필자가 중학교 때에 돌아가셨는데, 필자는 하필 필자가 여성으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대가 끊겼다는 원망을 수시로 할머니께 듣고는 했었다. 필자의 사촌 동생들은 남자아이들이었는데, 그들은 남자로 태어났으니, 태어난 것 자체로도 귀한 존재였지만 필자는 할머니에게 제사상도 못 차려줄 쓸모없는 '손녀'였다.
"계집애 따위가 뭘 한다고.. 우습구나."
이게 항상 필자가 할머니께 가장 많이 듣던 말이었다. 할머니는 필자에게 적당한 남자에게 일찍 시집이나 가서 애나 낳으라고 했다.
스물이 넘으면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서른이 넘으면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필자는 나이를 먹어갔는데, 글쎄. 한 가지 깨달은 건.. 할머니 또한 할머니의 엄마와 할머니가 그렇게 가르치고 강요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그러시지 않으셨나 싶더라. 왜냐면 할머니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남으로써 치러야 할 죗값과 희생은 너무나도 당연했으니까.. 그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사회와 가족들은 강요를 했고, 그렇게 배우고 자랐으니까. 본인 또한 여성으로서 본인이 겪으신 삶이 너무나도 아팠지만(어릴 때에 아버지에게 들은 할머니의 삶은 많이 안타깝고 슬펐다. 상처가 많으셨던 분..) 그 삶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손녀인 나에게도, 딸들과 며느리들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셨나 싶다.
어쨌든, 필자 또한 아리아의 작품처럼 필자의 사상과 자유를 구속했던 위험한 흐름에서 용기를 내서 필자를 존중해주지 않는 집안의 사람들을 떠났다. 그 이후에 호주에서 사막을 혼자 걷는 것처럼 아무 도움 없이 참 힘들었지만.. 오래 걸렸지만 필자는 진짜 필자의 삶을 찾았다. 그때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만약 그 자리에서 참고 인내하고 가만히 있었다면 필자의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해준 적당한 나이 많은 남자 만나서 시집갔을 거다. 밤마다 남자의 잠자리 시중이나 하며, 아이를 낳고 키우며 육아에 치였을 거다. 감히 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지도 못하며, 남자의 도움 없이는 운전도 못하고..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스스로 배울 생각조차도 안 하며.. 하루하루를 죽을 때까지 원래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살아갔겠지.. 말이 너무 심한가? 아니, 필자에게는 정말로 이게 현실이었다. 만약 원하는 대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여성으로서 살아갔더라면 나는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을까. 나 자신에 대해서 나도 잘 몰랐는데, 과연 내가 삶에 만족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사랑 받는 아내가 될 수 있었을까.
내가 느끼는 성장통은 마음이 찢어졌기 때문에 파괴적입니다. 나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애썼지만 당신의 말과 행동은 나를 잘못 정의하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리아에 따르면, 여성은 희생 외에 아무것도 제공할 능력이 없는 것에 정비례하여 자기희생을 한다. 그리고 자아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채, 삶을 통째로 희생한다. 여성은 그저 아이를 낳는 존재, 무조건적으로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존재라고 인식되었던 건 동서양 마찬가지였나 보다. 필자가 이제 나이를 먹어가니.. 필자의 할머니처럼 그걸 자신의 숙명처럼 너무나도 당연스레 여기며 살아간 여성들이 안타까웠다.
그들은 나를 망각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내 생각이 나 자신을 역행할 때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내 영혼을 찢는 면도날과 같았습니다.
여기까지 아리아의 작품들을 보고, 해석하며 필자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아리아의 상처와 가족들로 인해 마음 아팠던 시간들과 성장이 고스란히 작품에서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정 폭력의 희생양이었고, 그녀는 사회에서의 권력 역할에 대한 통찰력을 가정 폭력의 경험에서 얻었다고 한다. 조용하고 예쁘고 말 잘 듣는 수동적인 여성이 표준이 되는 보수적인 성에 관한 견해와 부모님과 사회가 주는 압박감은 그녀와 다른 사람들의 정체성을 빼앗는 것만 같아서 그녀는 자라면서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 분노했다고 말했다.
가부장적인 사회와 가정 폭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본인이 만약 이런 일들을 당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과 아픔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미성숙함은 부디 자제해주기를 바란다. 이 전시회는 가정 폭력의 영향과 특정 정체성의 측면이 어떻게 부과되는지에 관한 개인적인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규칙들과 억압들과 한계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달렸으며, 어렵겠지만 머무르든 떠나든지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용기를 내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직접적인 결과를 가질 수 있다.
아카이브란 디지털화한 소장품이나 자료들을 손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모아둔 파일이다. 이 작품을 보면 아리아의 감성과 물건들을 한 곳에 모아둔 것을 볼 수 있다. 가정 폭력으로 인해 가족들 간의 소통이 끊어지면서 어린 시절의 사진들과 추억의 순간들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작품이다.
입술 모양이 찍혀 있는 종이는 말하고 소통하고 싶었다는 인상을 주고 있으며, 작품에서 보이는 어릴 적의 웃고 있는 아리아 사진은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행복한 시절로의 회상으로 보인다. 메모 속의 내용들은 아리아의 안타깝고 아프고 외로웠던 마음들을 대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술이 어떻게 삶을 모방하는지에 대한 것과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 언급한다. 이 작품은 작품의 해방적인 성격을 강하게 말하면서 마치 날개를 닮은 듯한 커다란 옷걸이에 보관된다.
이 비디오 속에서 아리아는 그녀가 어린 시절에 페미니스트가 된 결정적인 순간에 대해 고민하고 말하고 있다. 아마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나는 나의 독립성을 임신했습니다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녀는 팝 문화에서의 여성 경험과 예술계에서 행해지는 여성 누드를 비판하며, 자신의 몸에 그림을 그림으로서 스스로 조각이 되는 퍼포먼스를 한다. 이 퍼포먼스는 여성이 미술 갤러리에 있기 위해 벌거벗을 필요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부엌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아리아의 성장기 사진들이 보인다. 이렇게 배경과 사진을 서로 합치는 방식으로 자아가 분리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가운데의 아리아의 어린 시절의 자아는 보이지 않는 팔에 안겨있는데, 그녀는 과연 그 팔의 존재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는지 혹은 억압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오른쪽 밑의 자아는 또 다른 어린 모습의 자아지만 마치 유령 같은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왼쪽 밑에 있는 성인 모습의 자아 또한 마치 이 부엌 배경에서 유령처럼 보인다.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작품 속의 인문들은 아리아가 어린 시절에 지냈던 집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이 작품은 피해자가 알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고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현실을 강요하고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빼앗는 방식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악은 없고, 악은 보이지 않으며, 악이 없다고 말하라고 강요한다.
정신적 학대가 신체적 폭력만큼 피해를 입히는 방식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학대에 관해 알 수가 없다.
어떤 의사가 그러더라, 진짜 정신병자들은 병원에 오지 않고.. 그 정신병자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병원에 온다고.
이 작품은 가정 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정체성이 학대자에 의해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약한 자아 감각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보통 이렇게 학대당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방식에 의해 정의가 되므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녀는 진정한 자신을 볼 수 없다.
이 비디오 속의 퍼포먼스는 피해자가 학대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겪는 투쟁에 대한 작업이다.
"나는 탈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손에 쓰여 있으며, 비디오 속의 손에 종종 글이 잘못 쓰인 것은 학대자를 떠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으며, 이것은 오직 한 번의 시도로 떠나는 것은 절대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피해자는 떠나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제지당하는 지점까지 계속해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반복합니다.
사람들은 아리아에게 종종 쉽게 말했다고 한다. "왜 못 떠나? 떠나면 되지."
이것은 피해자의 상황과 감정을 배려하지 않은 말이며, 피해자가 학대의 상황에서 도망친 후에 학대를 빨리 극복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피해자가 치유하고 극복하려고 할 때,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성(CPTSD)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제발, 본인이 겪지 않았다고 해서 남의 감정과 일을 쉽게 말하는 무식한 말은 자제하자. 본인들이 나은 사람이라서 안 겪은 게 아니라 인생의 고통과 경험이 덜 했다고 해두자.
필자가 아리아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픔과 상처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그녀는 극복했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아리아의 상황이었다면.. 그 끔찍한 상황들에 진작 삶을 포기했거나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할 생각은 절대 못했을 것 같다. 필자는 그래서 아리아가 대단해 보이고 또 안쓰럽고.. 대견하다.
아리아, 우리 앞으로도 계속 좋은 친구이면 좋겠어.
너의 삶과 작품들을 진심으로 항상 응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