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레인 Oct 24. 2021

파란만장 미스김의 고난의 시작

아버지가 떠나간 후에 변한 내 인생

내 인생은 어차피 시시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삶에 대해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어릴 때에 부모님조차도 건강한 게 제일이라며 유일한 외동딸이었던 내게 큰 기대를 하지 않으셨었다.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를 하시거나 공부로 스트레스는 절대 주지 않으셨지만, 기대를 안 한다는 것이 내게는 또 다른 스트레스였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내게 관심이 없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생각하는 방식과 방법이 좀 달랐을 뿐이다. 어쩌면 내게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모님께 많이 넘치도록 사랑받고 자란 덕분에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마음이 삭막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부작용이 있다면 난 그분들 덕분에 마음이 참 약하고 여리게 자랐다. 아니, 이건 타고난 것인가. 


나는 머리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지만 뛰어나지도 않았으며, 달리기는 맨날 꼴찌에다가 운동에는 지지리도 소질이 없었다. 유아 스포츠단 출신이지만 수영을 배울 때, 나를 가르친 수영 선생님들이 몇 주가 지나도록 물에 고개도 못 집어넣는 나 때문에 모조리 해고되실 뻔했을 정도로 물을 무서워했었다. 다행히 지금은 물개처럼 수영을 매우 잘한다. 


태어날 때는 하얀 백옥 같았다던 내가 커가면서 까무잡잡해졌다고 했다. 이 까무잡잡한 피부 덕택에 유치원 때에 '아프리카 시컴둥이'라는 다소 인종차별적인 놀림을 받고는 했었다. 청음에 소질을 보였을 때, 엄마는 나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어 하셨지만 나는 피아노 치는 게 너무너무 싫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큰 불효를 저지른 듯한 기분이다. 그래도 엄마의 성의와 과외비를 생각해서 좀 열심히 해보는 척이라도 해볼걸 그랬다. 그 후로 발레학원도 가보았지만 대회가 있을 때마다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식단과 처음에는 눈물 날 정도로 아팠지만 나중에는 아예 감각이 없어졌던 다리 찢음, 엄지발가락이 고통스러웠던 토슈즈가 나를 질리게 만들어서 그것도 때려치웠었다. 발레는 내 인생에서 경험했던 첫 지옥이었다. 


평생 부모님께 제일 감사한 것 한 가지는 어릴 때부터 만화책이든, 공포특집 소설이든지 보고 싶어 하는 책은 제한 없이 다 사주셨었다. 그러다가 보니 자연스레 책에 관심이 갖고, 책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국 역사 관련 일을 하셨었는데, 아버지를 통해 듣는 한국 역사 이야기들은 내 흥미를 유발했었다. 그러다 보니 사극 드라마라면 지금도 환장을 한다. 태정태세문단세, 한때는 시험 점수보다 더 자랑스럽게 외웠던 조선 왕들의 이름과 연도를 외우고는 했었다. 나는 당시에 드라마 장희빈을 너무 사랑했으며, 부모님은 내가 좋아하는 사극 드라마를 시작할 시간이면 어김없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고는 하셨다. 내가 장희빈을 너무 좋아하니까, 한 번은 아버지가 퇴근하는 길에 책을 사 오셨었다. 책 이름은 '인현왕후전'. 책을 아무리 좋아하는 나라고 할지라도 지금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나름대로는 나와 좋은 관계를 이뤄나가려고 노력을 하셨지만 아무래도 우리 부모님과 나는 솔직히 코드가 안 맞았던 것 같다. 그분들도 아무래도 아이를 생전 처음 양육하시는 것이라서 모든 게 서툴으셨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지금도 나에게 많은 부분이 참 서툴지만 말이다. 아이를 처음 낳고 키워봐서 그러려니 하고 이해한다. 나중에 내 자식도 나처럼 이해심이 많으면 좋겠건만.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부모님께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그들이 저절로 내 마음이 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아버지는 수두분했지만 내면은 고집이 매우 센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걸 내가 그대로 물려받았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세 번 이상으로 선이 넘어가면 상대는 반드시 눌러놓아야지만 직성이 풀렸다. 그리고 한번 아닌 건 죽어도 아닌 거다. 그 고집이 내 인생을 참 피곤하게 만들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서 고칠려고 노력하건만,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의 천성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중학교 3학년 때에 호주로 이민 오기 전에 갑자기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내 인생이 뒤바뀌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도 너무 감사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유독 아버지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시간들이 내게 주어졌었다. 생전 안 하던 행동들을 했었다. 어쩌면 아버지도 본인이 죽을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버지와 함께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인도 여행에 대한 생각들을 나눴었고, 성룡이 나왔던 '상하이 눈'이라는 할리우드 영화를 너무 재밌게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건 하나님이 아버지를 잃고 인생이 뒤바뀌어져서 고생을 할 나를 생각해서 좋은 추억과 기억이라도 끝에 남도록 배려해준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접했던 것은 나였다. 용산 경찰서, 아직도 그 전화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남산 근처를 나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트라우마는 아니지만 그곳에 가면 왠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가기 싫었다. 그날, 나는 왜 하필 학교를 일찍 조퇴했을까.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살아있었을까라는 바보 같고 말도 안 되는 억지적인 생각도 해보았다. 장례식장에 갔는데, 며칠 내내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솔직히 내가 시체를 확인한 적도 없고,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마치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마음속 어느 한편에 가지고 살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영정에 절도하기 싫었었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더더욱 이상하고 싫었었다. 


몇 년 전에 어느 날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아버지 머리가 하얗게 세었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나를 데리고 어느 화창한 날씨의 시골길로 데려갔는데, 그곳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세 개의 금으로 만든 미륵 불상 세 개가 있었다.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미륵이 날 보고 씩 미소를 짓더라. 그 꿈을 꾼 후, 바로 로또를 샀지만.. 로또는 되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왜 교회에 다니는 나를 굳이 미륵 불상에게 데리고 간 것일까. 아직도 그 꿈이 미스터리이다. 


가장 최근에 꾸었던 아버지의 꿈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가 꿈속에서 내 나이보다도 더 젊어진 모습으로 멋진 양복을 입고, 젊은 여자랑 데이트를 하고 있더라. 나랑 엄마는 아버지 없이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살았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젊은 여자를 만날 수가 있냐며 꿈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서 아버지랑 대판 싸웠었다. 꿈에서 얼마나 싸웠는지, 아침에 일어났는데 너무 피곤했었다. 커피 마시면서 우스갯소리로 엄마에게 말해주니 엄마가 웃으면서 "다행이네! 잘 지내나 보다. 거기서 젊은 여자 만나서 새출발 했나보네."라고 말하는데, 생각해보니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죽었든, 살았든.. 나는 아버지가 어디서든 자유롭고, 행복하고, 편하면 좋겠다. 


한창 예민한 나이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그게 더 훨씬 실감이 났었다. 아버지 없는 애, 안 겪어본 사람은 그 시선과 비교에 의한 서러움은 절대 모를 것이다. 마치 내 인생에서 악연 같은 담임 선생님을 만났으며,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받은 불평등과 차별을 당했던 기억은 무척이나 상처였다. 지금 시대에는 꿈도 못 꾸었던 일들이었지만 당시에 나는 그런 차별적인 그녀의 행동들에 대해서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었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속상해하는 게 싫어서 엄마에게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삐뚤어진 세상의 시선에 맞춰서 나 또한 삐뚤어져 갔다. 10대 후반부터 시작된 마음의 아픔들이 내 20대의 불행을 자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그저 아버지 수명이 짧아서 그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고로 죽은 것뿐인데.. 세상은 때론 엄마와 나를 죄인 취급하더라. 서러웠던 적도 참 많았었다. 

아버지가 없는 것이 한때는 너무나도 그게 원망스러웠고, 억울했었다. 그래도 어쩔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아버지가 그렇게 못했다는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 우리 집안에서 미술가가 나왔다고 친가, 외가 친척들 다 놀라셨을 정도다. 젊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이 아무 것도 아니지 않도록..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실 수 있도록, 오늘도 하나뿐인 딸은 늦은 나이임에도 열심히 공부한다. 이 모습을 보면 아버지는 과연 뭐라고 하실까. 늦은 나이에도 시집 안 가고 호주에서 박사 공부한다고 설치는 딸에게 한숨을 쉬실까, 아니면 우리 딸이 역시 보통이 아니라며 잘했다고 호탕하게 웃어주실까. 


명이 짧았던 아버지 덕분에 파란만장 미스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The Third Space, 제3의 공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