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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인 Oct 24. 2021

여성으로서의 삶

미워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나의 호주 할머니

아버지의 죽음을 3년이 넘도록 몰랐었던 할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나서 나를 호주로 불러주었는데, 호주에 와서 만나고 겪었던 아버지의 가족들은 내게 너무 냉정했었다. 이것이 내 삶의 애정결핍의 시작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각자 한국을 떠나서 삭막한 이민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오느라고 이기적으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호주 할머니"라고 어렸을 때부터 불러오면서 제대로 만난 적은 몇 번 없던 아버지의 어머니인 할머니는 처음 며칠은 잘해줬지만 곧 본성이 드러났었다. 아들 잡아먹은 며느리의 딸인 내 마음속에 생전 처음으로 한이라는 것을 심어주었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귀한 아들을 잃은 슬픔은 내게 날카로운 칼이 되어서 돌아왔다. 


호주에서의 나는 매우 외롭고, 어두웠었다. 하루하루가 몹시도 불행했으며, 인생은 불공평 그 자체였다. 주변 친구들에 대해서 열등감이 생겼으며, "왜 나는 하필 이렇게 태어나서.."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죽지 못해서 "억지로" 살아가는 것, 내 20대에 대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뜨거운 사막에서 혼자 걷는 것 같았던 외롭고도 참 길었던 시간들이었다. 


친가 쪽은 남존여비 사상이 매우 강한 집안이었다. 우리 집안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난 죄로 집안의 남자들에게 많은 기회들을 빼앗기고 살았어야 했으며, 희생을 강요당했다. 사촌 동생들은 남자아이들이었는데, 그들은 남자로 태어났으니, 태어난 것 자체로도 귀한 존재였지만 필자는 할머니에게 제사상도 못 차려줄 쓸모없는 '손녀'였다. 아버지의 딱 하나 남은 자식이 하필 계집애라서 나를 참 미워했었던 할머니.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서 잘해줄 필요가 없다는 쓸데없는 손녀가 바로 나였다. 


내가 나이가 들면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아직 어려서 이해심이 부족한 건가?

아니. 현재 서른 중반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이다. 그녀와 보냈던 시간은 오래도록 내 자존감을 갉아먹는 계기가 되었었다. 할머니를 감당하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었다. 그리고 제일 사랑했던 아들이 남기고 간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모든 게 비범하지 못하고 평범하고 수두분 했던 겉모습이 할머니는 실망해서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계집애 따위가 뭘 한다고.. 우습구나." 이게 항상 내가 할머니께 가장 많이 듣던 말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적당한 남자에게 일찍 시집이나 가서 애나 낳으라고 했다. 


한 가지 깨달은 건, 할머니 또한 할머니의 엄마와 할머니가 그렇게 가르치고 강요했기 때문에 나에게도 그러시지 않으셨나 싶더라. 왜냐면 할머니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남으로써 치러야 할 죗값과 희생은 너무나도 당연했으니까. 그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사회와 가족들은 강요를 했고, 그렇게 배우고 자랐으니까. 본인 또한 여성으로서 본인이 겪으신 삶이 너무나도 아팠지만 그 삶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손녀인 나에게도, 딸들과 며느리들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셨나 싶다. 


어릴 적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할머니의 인생은 기구했었다. 할머니 또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녀의 삶에서 아무런 선택조차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왔어야 했으며, 평생을 그 평범치 못한 남편을 견뎠어야만 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워낙 좀 유별나셨다. 매력적이고, 멋있는 사람이었던 건 인정하지만 가정적이기에는 할아버지는 너무 끼와 재능이 많으신 분이셨다. 이 피가 나에게도 흐르기 때문에 내가 늦은 나이임에도 미술 공부를 어떻게든 잘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서 할머니는 악해져야 했다. 만약 그녀가 이기적이지 못했다면 아마 맨 정신에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 할아버지가 밖에서 나아온 자식까지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키웠어야만 했던 그녀의 심정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나에게 왜 하필 계집..이라는 말은 어쩌면 "계집"으로써의 그 시대를 견뎌왔어야만 했었던 할머니의 인생이 너무 슬펐기 때문에 화가 났던 것이 아닐까. 쓸데없는 취급을 당했던 계집아이,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태어난 자식이 그 쓸데없는 취급을 당하는 계집이 될까 봐, 어쩌면 할머니는 슬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외면할 수가 없어서 호주로 데려왔지만 할머니는 내게 미움보다는 어쩌면 여성으로서의 본인의 삶을 대물림하는 게 화가 났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결국 나는 나의 사상과 자유를 구속했던 위험한 흐름에서 용기를 내서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집안의 사람들을 떠났다. 그 이후에 호주에서 사막을 혼자 걷는 것처럼 아무 도움 없이 참 힘들었다. 오래 걸렸지만 나는 진짜 나의 삶을 찾았다. 그때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만약 그 자리에서 참고 인내하고 가만히 있었다면 내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만약 그때 떠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해준 적당한 나이 많은 남자 만나서 시집갔을 거다. 밤마다 남자의 잠자리 시중이나 하며, 아이를 낳고 키우며 육아에 치였을 거다. 감히 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지도 못하며, 남자의 도움 없이는 운전도 못했을 것이다. 영어 한마디도 제대로 스스로 배울 생각조차도 안 하며, 하루하루를 죽을 때까지 원래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살아갔을 것이다. 말이 너무 심한가? 아니, 나에게는 정말로 이게 현실이었다. 만약 원하는 대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여성으로서 살아갔더라면 나는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을까. 나 자신에 대해서 나도 잘 몰랐는데, 과연 내가 삶에 만족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사랑받는 아내가 될 수 있었을까. 


얼마 전에 어떤 남자분과 대화를 했었는데, 나에게 결혼하면 여성으로서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 뭐냐는 질문을 해주셨었다. 결혼하면 여성으로서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란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나 먼저 내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야지만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으니까. 그분이 그동안 여성들을 만났을 때에 이 질문에 대해 들었던 대답은 항상 아이 둘을 낳고,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이라는 대답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행복'에는 편안함과 안정이 있지만 미래에 대한 비전은 없다. 한때는 나도 그게 옳은 줄 알고 여자로서 순종적이고, 뻔한 인생을 추구했었다. 다행히도 내 인생에서는 그게 허락되지 않았었다. 덕분에 이 나이 때까지 엉뚱하게 미술을 한다며 이렇게 설치고 있다. 이게 옳은 선택이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는 내 삶에 만족하고, 시간을 되돌리면 분명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할머니를 향한 나의 마음은 여전히 좀 복잡하다. 애정과 혐오 사이를 오간다고 할까.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며, 그녀에게 좀 더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난 그녀 또한 피해자이니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당시에 나는 너무 어려서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이라면 그녀의 딱딱한 마음을 안쓰럽게 여기고 조금 더 감싸안아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손이 기억난다. 두툼하고 단단했던 손, 좀 더 왜 난 따뜻하게 간직하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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