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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인 Oct 24. 2021

일곱번 넘어져도 여덟번 들이대는 용기

칠전팔기

20대의 몇 년 동안은 호주에서 좀처럼 정을 붙이고 적응을 하며 살아갈 수가 없었다. 깎아 내 여진 자존감들은 쉽사리 회복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건만, 그 꿈 조차도 와장창창 깨지게 되었다. 그렇게 20대 중후반에 아주 크게 인생에서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 취미로 미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미술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인생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다 어색하고 서툴렀었다. 

그러다가 메리안이라는 호주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선하고 다부진 인상의 금발 머리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가 헤드 티쳐(Head Teacher, 학교의 각 과를 운영하는 최고 책임자)로 있는 TAFE(Technical and Further Education의 약자로 공립 호주 기술학교)에서 초급 미술 1년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또 다른 고난이 제대로 시작되었었다. 

이때부터 첫 1년은 정말 매일매일 울었던 것 같다.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시작했던 미술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더 너무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었다. 그래도 그 힘든 시간들 덕분에 원래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발휘되기도 했다. 원래의 문제들이 새로운 문제들에 덮어져서 어느새 다 잊고, 바쁘게 지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었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때려치울 수가 없었다. 

그전에 호주에서 두어 번 그만뒀던 일들이 생각나서 이번만큼은 도저히 이 상태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까지 그만두면 왠지 인생에서 패배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죽을 때에 죽을지언정, 나 자신에게까지 비참해지기는 싫었다. 


당시에 서툴렀던 영어로 인해서 주변에서 엄청난 무시를 받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 사람 하나도 없는 곳에 무슨 용기로 그렇게 뛰어들었는지 모르겠다. 영어를 잘 이해할 수가 없어서 참 수많은 실수들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에게 미움도 상당히 많이 받았었다. 그럼에도 엄청난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이끌어주었던 메리안과 다이앤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수하고 혼나서 훌쩍거리는 나를 다이앤은 항상 말없이 꼭 안아주었었다. 


당시에 같이 공부했던 호주 유태인 아이와 중국 여자에게 "지금이라도 포기해."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었다. "너는 영어 할 때에 순수해 보여"라고 말하며 키득키득 웃는 그들을 보면서 속이 부글부글 했었다. 어색한 내 영어 발음을 비꼬았던 것이다. 근데, 그중 중국 여자는 본인이 굉장히 스스로 영어를 잘하는 줄 알았지만.. 본인 또한 이민자로서 내게 이렇게 영어 지적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그냥 일찌감치 포기해, 어차피 너는 절대 못해. 여기서 나가라고." 

그런 말을 듣고, 매일 한 시간 거리를 운전하면서 울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오기가 생겼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비아냥을 거리든지 말든지.. 

1년 동안 죽어라고 내가 해야 할 일들에 집중을 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할 그곳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장소를 만들었고, 좋아하는 주변 맛집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좋은 점들을 하나씩 찾아가니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한국 음식이 아닌 호주 음식들에 익숙해졌으며, 호주의 커피 문화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 앞에 아주 좋은 갤러리가 있어서 시간 날 때마다 그곳을 들락거렸는데, 결국은 그 후에 그 갤러리에서 내가 전시회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1년 후에는 나를 비꼬고 말로 괴롭혔던 사람들이 오히려 본인들이 먼저 중간에 포기하고 떠났으며, 내 주변에는 나에게 따뜻한 시선과 마음을 베풀어주는 호주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년 동안 그들은 나를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때 당시에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승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메리안이 건강 문제로 요양을 떠났는데, J라는 백인 중년 여성이 내 담당 선생님이 되었었다. J는 나를 이유 없이 처음부터 나를 참 미워했었다. 그녀 또한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려고 무던히도 애썼으며, 온갖 유치한 일들이 벌어졌었다. 


"네 까만 머리가 문제야."라는 말을 내 귓가에서 들었던 소름 끼쳤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다. 녹음을 하지는 못했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기억이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아시아 사람들에게 나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아마 그래서 아시아 사람인 내가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로 인해 내 작품들이 다 망가졌었다. 만약 이게 단순히 J의 실수라면 J는 선생을 할 자격이 없을 정도로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이건 단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제출했던 에세이는 낙제(Fail)는 절대로 주지 않으면서 7번이나 다시 써오라고 강요당했었다. 처음에는 내가 영어를 너무 못해서 에세이를 너무 엉망으로 써서 크게 잘못한 줄 알았다. 어쩔 때는 눈도 안 마주치고, 그냥 에세이를 다시 써오라고 하더라. 그렇게 지치고 지쳐서 그만 포기할까.. 나는 왜 이렇게 모자란 사람일까 생각했던 무렵, 내가 그녀에게 제출했던 에세이는 까만색 봉지 속의 쓰레기 통에 박혀있었다. 


8번째 에세이를 다시 쓸 때, 쉬고 있던 메리엔에게 처음으로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녀는 이 학교의 최고 책임자이자 담당자이니 날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J로부터 느낀 어려움들은 분명 인종차별이라고 느낀다고 똑바로 차근차근 말했다. 메리엔은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다며, J가 그런 건 절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오해.. 오해라기에는 이건 너무 심했는데, 역시 가재는 게 편인가 싶어서 서운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지금 나를 도와줄 사람은 메리엔뿐이니 영어로 인한 고충과 에세이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메리엔의 조언들과 함께 문제점들을 짚어가며 처음부터 다시 하나씩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메리엔에게 최종 검사를 맡은 후, 다시 에세이를 J에게 제출했다. 


근데, 그 에세이가 다시 또 J로부터 바로 거절당했다! 물론 J는 내 에세이를 메리엔이 조언해주고, J가 7번이나 지적했던 그 심각했던 문제점을 검토하기 위해 그전에 읽어봤던 것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한 메리엔은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분노를 금치 못했고.. 나는 그 이후에 두 번 다시는 학교에서 J를 볼 수 없었다. 


그 후에 내 담당으로 온 새로운 선생님이었던 월터는 정말 좋은 분이셨다. 그분과 개인적으로 가깝지는 않지만 선생님으로서 나에게 아낌없는 가르침과 도움들을 주셨었다. 월터는 성품이 온화했던 탓에 인기가 매우 많았었는데, 한 번은 월터가 날 도와주려다가 손을 베었던 적이 있었다. 월터에게 너무 미안해서 쩔쩔 매고 있는데, 한 학생이 다가와서 그러더라. "오, 월터! 당신의 피가 나는 손가락을 내가 핣아도 될까요?"

그 순간, 나는 아직도 예술가들과 호주인의 유머를 이해하려면 멀었구나 싶었지만 그 말을 듣고 자꾸 웃음이 났었다. 월터는 함박 웃음을 터트렸고, 다시 한번 나는 학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한 결과, 그 후에 나는 메리엔과 월터의 추천서들로 결국 호주에서 꽤 괜찮은 대학교 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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