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영재 Jun 22. 2023

망하기 직전의 우리

스타트업 #7 - 악전고투

몇 년 전, 스타트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치 중 하나인 멀티플이 말도 안 되게 높았던 적이 있었다. 함부로 판단하려는 건 아니지만 모두가 지금보다 훨씬 쉽게 투자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라 입을 모아 말한다. 가히 투자 호황기라 불리우던 시절이었다. 매출 혹은 심지어 프러덕이 없는데도 아이디어만으로 높은 가치평가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명백히 투자 혹한기이다. 많은 회사들이 준비되지 않은 채 냉혹한 현실에서 생존을 다투게 되었고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현금은 어느새 몇 개월도 남지 않아 시한부 비즈니스가 되어버렸다. 빠르게 시장의 흐름을 파악했던 똑똑한 회사들은 진작에 몸집 줄이기에 나서 생존모드로 들어갔지만 그러지 못한 회사들은 지금 창업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을 것이다.


악전고투

나에게 지난 수개월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시장의 호황을 전제로 계획했던 재무계획은 실패했고 그 결과 월 1억 원이 넘는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런웨이(생존기간)는 하루가 무섭게 줄어들고 있었고 다음 라운드를 위한 목표 매출은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된 듯했다. 떠나는 직원들까지 생기며 우리는 마치 '망하기 직전의 스타트업'이 된 것 같았다.


상황이 이쯤 되니 멤버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처음으로 서로 날카로운 말들이 오가기도 하고, 평소 프로페셔널했던 멤버들도 불안감이 생겼는지 '카더라'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의 원인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고, 난 어디 기댈 곳 없이 타지에서 하루에도 십 수 번 이경영 배우님의 명대사를 속으로 되뇌었다. "졸라 고독하구만"


최근 읽은 하드씽(The hard thing about hard things)이라는 책 초반에는 '악전고투'라는 단어를 사용해 스타트업 창업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고독함을 설명한다. 팀원들은 그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에 있어서 CEO보다 한 분야를 깊게 알 수는 있어도 다양한 영역으로 넓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반면 수십, 수백 개를 투자한 투자사들 역시 CEO보다 넓은 영역은 알아도 그 회사 프러덕의 깊은 내막은 전혀 알지 못한다. 프러덕의 구체적인 기술부터 운영, 고객, 회사의 재무 상태 등을 넘어 시장의 분위기, 투자, 크고 작은 경쟁사 등 이 모든 걸 한 번에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CEO 밖에 없다.


그래, 이 상황의 원인은 나지만 이 상황을 해결할 사람도 나다. 모든 걸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사막을 횡단하는 우리 팀원들에게

나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팀원들을 모아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사막을 횡단하는 우리 팀원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내가 왜 이 회사를 시작했고, 우리가 지금 왜 힘든지, 그러나 우리가 어떤 걸 잘했고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멤버들이 더 노력해 주길 부탁했다.


또한, 우리가 잘하고 있음을, 사실 시장이 위축되어 모두가 힘든 것임을, 나의 워딩이 아닌 멤버들이 느낄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고 난 그 방식으로 투자유치를 선택했다. 우리 방향성을 공감받지 못하고 우리 팀의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투자유치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우리의 비전에 또 한 번 공감해 주신 투자사들에게 빠르게 두 번째 브릿지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숙연한 분위기로 시작했지만 프레젠테이션 끝은 다 같이 박수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우리 팀의 Phase 2는 이제 시작되었고 우리 멤버들은 다시금 공동의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갈 수 있게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창업 2년 차, 몸이 망가지며 배운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