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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원 Jun 02. 2016

분노를 야기하는 예술은 없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 그것 또한 표현의 자유다

예술은 특이하게도 


"미"와 "추"라라는 것을 사전적 의미로써 정의할 수 없기에


그 작품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추한 형상일지라도


또는 현세에 다시없을 미적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보는 이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 마음은 그들 고유의 관점과 해석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 해석을 통해 감탄과 찬사와 또는 동정과 사랑과 연민과 아픔이라는


은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분노와 폭력과 증오와 절망이라는


짙푸른 바닷속 암초와도 같은 날카로운 감정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 통념으로 충분히 사람들이 혐오할만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작품을 만들고


그 내부에 자신만이 아는 고상한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예술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표현의 자유를 무시하고 진정한 의미에 접근하려 하지 않는 바보 천치로 만드는 것은


그것도 역시나 예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감상자를 희롱하고 농락하는 자기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불쾌감을 야기하는 그것은 그저 


무딘 그들을 날카롭게 만드는 쓸데없이 좋은 숫돌에 지나지 않는다.


제작자의 의도와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의 오해라고 과연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오해로 인해 제작자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았다고 과연 정의할 수 있을까?


어불성설, 누가 봐도 "그런 의미"라면 그것은 제작자의 의도가 어떻든 "그런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에 놓았던 그 순간에 이미 각오했었어야 했다.


분노를 야기하는 예술은 없으며 분노 또한 엄연한 표현의 자유이다. 


제작자는 권위자가 아니라 그저 작품의 아버지일 뿐이기에


아들을 세상에 내놓은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평가를 세상에 맡겨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예술에서의 갑과 을은 없다.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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