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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열두시 Oct 08. 2015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 첫 번째

낯선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스마트폰 카메라의 성능이 좋아지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사진 한 장이 차지하는 용량이 커지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몇 개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활용해 사진을 저장하고 있지만 가까 두고 싶은 사진이 많을 땐 어떤 사진을 지워야 할까 늘 고민이 된다. 그렇게 갤러리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들 중 오래된 것들 하나씩 살펴보던 어느 날, 3년 전 이화동 벽화마을에서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무지개를 그려 넣고 있는 어느 남자의 모습이 좋아 담았던 그 사진,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남자는 흐렸던 하늘이 물러가기 전에 무지개를 그려야 한다는 듯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그 조급함 때문이었는지 무지개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고 몇몇 색이 빠진 채 그려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기에 나는 제대로 된 무지개가 보고 싶었고,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남아있을지 모르는 비를 막기 위해 화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고, 나는 그렇게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위)합정 메세나폴리스 / (아래)이화동 벽화마을




사실 벽화마을에서 사진을 찍는 그 순간 나는 우산을 들고 있지 않았고 화가는 이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여러 번 작업을 해봤다는 듯, 비가 그친 후가 아닌 빗줄기가 약해졌을 즈음 무지개를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조금 더 여유롭고 완벽하게 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잠시 다른 곳에 있는 우산을 빌려오기로  .


혹시 흐린 날씨에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을 잊지는 않았을까, 홀로 그리는 외로움에 무지개를 다 그리지 않은 채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그래서 한 가지 색이 아닌 여러 색을 지닌 우산을 준비했고, 모자로는 들을 수 없는 빗소리를 벗 삼아 흥얼거릴 수 있도록 한 무리를 데려왔다.      .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위)순천만정원 / (아래)하동의 어느 골목길




올 여름 휴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 중 하나인 순천만정원. 정원 안, 꿈의 다리에는 '사랑은 꽃씨처럼'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수 많은 문장 중, 내게 유난히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던 이유는 사랑을 해봤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한들, 서로를 모르고 지내왔던 그 시간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텐데. 그래서 서로가 함께 씨를 뿌리고 가꿔야 둘의 사랑도 더 깊어지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렇게 피어나는 꽃은 어떤 꽃이든 깊은 향을 갖고 있을 테고, 더 많은 꽃을 피워내는 시작점이 될 수 있을 텐데. 나도, 우리도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




서두른다고 빨리 피어날 리 없는 우리의 꽃일 테니
천천히 페달을 밟아 우리라는 밭에 씨앗을 전해주고
다시 천천히 페달을 밟아 인내라는 거름을 전해줘야지

꽃씨 배달 왔어요!






오랫동안 보고 싶어서


(좌)길상사 옆 어느 골목길 / (우)하늘공원





낮이 밤으로 바뀌는 '전환의 시간'이 가장 기대되는 것처럼, 내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간은 어느 때보다 기대되고 설레는 시간이다. 가을의 시간은 그보다 더! 하지만, 좋아하는 만큼 체감하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 실제로 가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가을의 하루를 매 번 아쉬움  .





2013년의 가을도 짧은만큼 아쉬웠고,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은 곳이 '길상사'가 위치한 성북동이었다.

서울에서도 가을을 가장 깊게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그 날은 가을의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찾아갔었고, 비가 많이 내렸었다. 성북동을 방문할 때의 코스는 늘 단순하다. 한성대입구역에서 길상사까지 빠른 걸음으로 도착해 안쪽을 살펴보고 나와, 오면서 지나쳤던 골목길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다. 비가 막 그칠 무렵 나는 어느 골목길로 접어들며 아스팔트 위에 누워있는 수많은 은행잎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스스로도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함께 모여 가을빛을 잔뜩 쏟아내고 있었고 덕분에 나는 조금은 밝은 이별을 고할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다면, 가을을 늦출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가 생긴다면
은행잎을 닮은 빛을 들고 성북동 골목길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조금 더 오랫동안 가을빛을 쏟아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아, 꽃씨를 먼저 배달하고 찾아가도 용서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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