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간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도 매일 아침 나 자신의 태엽을 감고 있다. 침대에서 나와 이를 닦소, 수염을 깎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현관을 나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대략 서른여섯 바퀴쯤 드르륵 드르륵 태엽을 감는다. 자, 오늘도 열심히 살아보자, 하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이 또한 멈춰진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매일의 정해진 태엽을 잠시 멈추거나 내려놓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무레 요코는 <일하지 않습니다>를 통해 인간은, 상상하는 그대로 보다는 가끔은 반전이 있는 쪽이 훨씬 재밌다고 했지만, 그로인해 시작되는 불안함은 오늘은 어제와 다른 시작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가뿐히 짓눌러 버린다. (그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삐걱거림으로 시작되는 매일의 첫 경험은 매력적이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상황에 따라 준비된 여러 개의 태엽이 있고, 그 태엽을 그때그때 달리 움직일 수 있다면. 나의 매일이 조금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작은 변수와 돌발상황이 생겨도 나는 금세 혼란에 빠져버린다. 그 와중에 나도 우리도 자주 내뱉는 말이 '다음'으로 시작되는 말이다. 당장의 태엽을 멈출 수 없는 상황 속, 우리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말들.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
다음엔, 꼭 그렇게 해야지.
다음엔, 우리 밥 한 끼 하자.
우연한 짧은 만남을 뒤로하며, 시간 되면 밥 한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자는 '다음'도. 이번에는 건너뛰지만 꼭 해보겠다는 스스로와 모두를 향한 '다음'도. 돌이켜보면 그다음은 우리에게 제대로 닿은 적이 없었다. 다음은 당연히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서른을 준비하며 여러 번 스스로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다음'을 찾고 있는 오늘인 것이다.
되돌아보면 태엽을 멈춰도 하지 못했을 것들이 대부분인데. 시간이 없어서, 이번은 아니라서가 아니라 충분한 시간과 의지가 있어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 참 많은데. 그래서 우리에게 '다음'은 내뱉을 때는 달지만, 내뱉고 보면 쓰디쓴 말일지도 모른다.
이번까지만 이렇게 하고
다음부턴 이러지 말아야지라며
버려버린 시간들이 언젠가 한데 모여
우린 뭐 네 인생 아니었냐고 따져 물어올 것만 같다
엄지용 <시다발, 다음부터>
매일이 바쁘니까. 각자의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까. 우리의 시간으로 묶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그래서 시간이 되면, 다음에- 이번이 아닌, 다음에- 라는 말로 우리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하는 것은 아닐까. 그 위로가 잘못된 위로이자, 변명을 가장한 위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다음'을 습관처럼 찾고 있다.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그 '다음'에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내일의 태엽이 드르륵 드르륵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시간을 내어, 다음에- 가 아니라
시간이 나면, 다음에- 라고 말하며
우린 그 다음이 언제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되려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 라는 말을 매일 같이 하게 되는 한 해의 마지막 달. 내게 요즘의 '다음'은 다가올 2019년이자, 서른셋에 맞이하는 새해를 향해있다. 서른에 접어들며 작성한 목표들을 둘러보고, 작년 이맘때 제주도에 머물며 생각한 2018년을 살펴보니, 참 많은 '다음'을 생각했구나 싶다. 여전히 닿지 않은 '다음'으로 가득찬 시간이었는데, 또 다른 '다음'으로 채워지는 2019년의 계획들.
이번만큼은, 다음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할거야. 라는 생각과 말을 건내면서도 더욱 견고해진 나의 태엽을 보며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다음'에 포함되었던, 하지만 나에게 결국 닿지 못했던 시간들이 내게 우린 어떻게 할거냐며 따져 묻기 전에, 다시 한 번 집중해보려고 한다.
우리의 다음은,
꼭 우리에게 닿을 수 있길 바라며.